친한 후배와 점심을 먹으려고 회사 로비 밖 건너편에 서있었다. 추운데 왜 밖이냐고? 로비에 있으면 이런저런 아는 얼굴과 마주친다. 그때마다 친밀도에 따라 다르게 인사해야 한다. 친분 있는 사람에겐 “아이고,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식사하러 나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정도의 말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서로 알기만 아는 사이는 꾸벅 목례로 갈음한다. 언제부턴가 그것조차 성가셔서 아예 로비 밖으로 나간다. 점심 한 끼라도 좀 맘 편히 먹자.
내가 서둘러 나왔나 보다. 점퍼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출입문 건너편에서 후배를 기다린다. 출입문과 나 사이에 회사 지하 주차장 출입구가 면한 좁은 이면도로가 지난다. 조금 있으려니 건물에서 나오는 회사원 무리들 중에 기다리던 얼굴이 보인다. 후배도 나를 봤다. 서로 손을 흔들어서 존재를 확인한다. 후배가 길을 건너오려던 찰나! 지하 주차장 출구에서 올라온 승용차 한 대가 외엥 속도를 높여 후배 앞을 스친다. 그 짧은 순간. ‘얼마나 급한 일이 있다고 운전을 저렇게 위험하게 하나?!’ 머릿속 문장이 완성될 때쯤. 속도가 더 붙은 차가 반원을 그리며 회사 외벽을 쾅! 그대로 들이받는다. 육중한 세단 승용차 궁둥이가 펄쩍 솟았다가 꽂히듯이 내려앉는다.
사고가 나면 일순 세상이 멈춘다. 기다리던 나도, 건너오던 후배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위 수많은 인파가 ‘동작 그만’인 상태가 됐다. 마치 누군가 포즈(pause) 버튼을 눌러 동영상 재생을 멈춰놓은 것 같다. 눈앞에 생생한 광경을 보고도 사고 중추가 해석해내지 못한다. 이게 무슨 일이래!? 그렇게 영원 같던 찰나가 지나고 세상 만물이 다시 동작한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웅성거린다. 외벽이 무너지고 가로등이 쓰러졌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차를 봤더니 보닛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자동차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이 완전히 뭉개졌다. 운전석 문이 힘들게 열린다. 단번에 열리지 않는 것을 보니 경첩 부속이 고장 난 듯하다.
의협심일까 반사적인 행동일까. 운전석 문을 밖에서 잡고 당겼다. 다리 한쪽을 내리고 운전자가 나온다. 우리 엄마 또래 여성이다. 이른바 ‘멘붕’이 와서 넋이 나간 얼굴이다. 보닛에서는 계속 엔진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난다. 운전자에게 시동부터 끄게 했다. 가볍게 부축해서 하차를 도왔다. 눈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다. 제 값을 한 에어백 덕분이다. 한데 뒷좌석에 동승자가 있다. 뒷문을 열어 안을 보았더니 두 사람이다. 그들도 운전자와 비슷한 연배다. 뒷좌석은 에어백이 없다. 차가 본격적인 도로로 나가기 전이라 안전벨트도 미처 못 채웠던 모양이다. 한 사람은 앞좌석 등에 얼굴을 부딪쳤다. 얼굴 한쪽이 벌겋다. 피가 보이진 않았다. 목, 등, 허리쯤을 다친 것 같다. 얼른 일어나서 나오지 못한다. 그러고 있을 때쯤 회사 보안 요원들이 왔다. 구급차며 견인차, 보험사를 부른다. 거기까지만 보고 나는 퇴장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아니 밥 먹을 사람은 밥 먹어야 한다. 후배와 밥술을 뜨며 방금 전의 충격을 소회한다. 원인이 뭐였을까. 말로만 듣던 급발진?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가장 먼저 차에 접근했는데 엔진은 공회전 하고만 있었다. 급발진 사고는 차를 멈춘 후에도 엔진이 굉음을 낸다고 알고 있다. 추측건대 고령 운전자의 실수, 운전 미숙 때문일 것이다. 아니지. 그분도 젊어서는 베스트 드라이버였을테니 '운전 과숙'이다. 회사 주차장 출구는 경사로 위에 있다. 바리케이드가 열리고 가속 페달에 힘을 준다는 게 끝까지 밟아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가족 중에 고령 운전자, 모친의 자가용 생활이 문득 걱정된다. 무엇보다 인명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다. 점심시간 유동인구가 한참 많을 때인데 마침 찻길을 건너는 사람이 없었다. 하마터면 인명 사고를 정면으로 맞닥뜨릴 뻔했다.
상상하기 끔찍한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후배가 “형, 저 사무실에서 몇 초만 일찍 일어났어도, 몇 걸음만 앞서 걸었어도 지금 이렇게 밥 먹고 있지 못했을 수도 있겠어요.” 하는데 가슴이 철렁한다. 맞는 말이다. 그 몇 초 몇 걸음이 운명을 갈랐다. 떠올리기조차 싫지만 그랬으면 나도 온전히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끼는 후배의 사고 현장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한다. 끔찍한 장면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다. 오늘 점심 약속은 후배가 청한 것이지만 만일 내가 불러내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후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수씨에게 평생의 죄인이 됐을 일이다. 나와 나의 가정도 무너진다. 불행이 전염의 힘을 갖는다. 머릿속에서 아까의 장면을 초당 120 프레임의 슈퍼 슬로 모션으로 재생한다. 여기서 이랬더라면? 몸서리가 처진다.
가수 노사연 누님이 노래하신 것처럼 우리 만남이 우연이 아니듯, 우리의 일상은 결코 우연한 게 아니다. 보통의 하루는 결단코 보통의 조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고가 그렇다. 그때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갔었더라면, 몇 초 몇 분만 기다렸더라면, 기다리지 않고 일어났더라면, 그날 내가 너를 만났더라면, 혹은 만나지 않았더라면. 찰나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짓는다. 나비가 만든 단 한 번의 날갯짓이 온 우주의 운명을 바꾼다. 지금 당신과 나의 무탈함은 불행의 조건이 한 날 한 시에 일제히 정렬하지 못한 덕분이다. 한 발 삐끗하면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런 것을 천문학적인 확률로 버텨내고 있는 것일는지 모른다. 일상의 평온은 실은 엄청난 행운의 연속인 것이다. 그런 조건을 유지하는 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의 평범한 시간이 그래서 특별하다.
후배와 밥을 먹고 회사로 돌아온다. 어쩌면 후배와 나는, 운명이 완전히 뒤바뀐 누군가가 그토록 소원했던 시간을 살게 된 것일지 모르겠다. 그들은 불운하게도 우리보다 겨우 몇 걸음 빨랐거나 아니면 느렸을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인생을 살아낼수록 흔한 잠언의 진의를 점점 더 절감하게 된다. 행복은 높은 곳에 있지 않다. 지금 서있는 내 자리에서 위태롭지 않은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믿는다. 평범한 귀갓길이 끔찍한 악몽이 됐을 세 분의 탑승자에게 마음 깊은 위로를 보낸다. 그들의 일상이 어서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나와 후배는 보너스 인생을 살아가기로 한다. 일단은 오늘 오후 회사에서. 어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