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개를 기르지 않는다. 몇 해 전 본가에서 기르던 개가 죽었다. 나의 애견생활은 그것이 마지막이다. 아니지. 애견생활은 비겁한 말이다. 장가든 이후로 소홀했으니 ‘애견’에 이르지 못했다. 함께 살지 않았으므로 ‘생활’도 아니었다. 열여덟 살 먹은 늙은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아주 어릴 적 외할아버지 집에 개가 있었다. 너무 어릴 때라 생김새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른들 말로 덩지 큰 순둥이여서 나와 동생이 말처럼 타고 놀았단다. 동생은 아예 개집으로 같이 들어가서 자기 밥을 개 한 입 저 한 입 나눠 먹곤 했다. 명절에 다시 갔더니 개가 없었다. 어쩌다 집을 나갔는데 옆마을 노인네들이 뒷산에서 잡아먹었다고 들었다. 부평 사는 이모는 지금도 그 개를 그리워한다. 이모를 가장 많이 따랐단다. 명견이었다고 회상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우리 집에도 개가 생겼다. 부부동반 모임을 다녀온 부모님이 새끼 강아지를 얻어왔다. 자정이 좀 지났을까. 동생이랑 한 방에서 자고 있는데 웬 끙끙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이불속으로 강아지를 넣어줬다. 얼룩무늬 털 뭉치가 품 안에서 꼬물거린다. ‘푸치’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티브이에서 방영하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개 이름을 따왔다. 예방 접종을 맞히려고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품종을 물으니 ‘스피치’에 가까운 잡종이란다. 푸치는 우리 집에 오래 있지 못했다. 성견이 될 무렵 아부지가 다른 곳에 수소문해서 보내버렸다. 너무 사납게 짖고 사람을 물려고 들었다. 아파트에서 기르기 곤란했다. 버릇 고치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때는 이찬종 소장도 강형욱 훈련사도 없었다.
중학생 때 중간시험을 빼어나게 잘 봤다. 동기부여의 원천은 강아지였다. 엄마, 동생과 천호동 애견숍에 갔다. 까만색 새끼 푸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 거실에 내려놓으니 검은색 털실이 돌아다닌다. 눈동자도 새까매서 웅크리고 있으면 앞 뒤 분간이 안 간다. ‘또또’라고 이름 붙였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가 기르는 개 이름을 모티프로 했다. 또또는 병이 있었다. 잘 있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인류가 품종 개발을 거듭하면서 생긴 유전병이란다. 또또는 영리하고 예민했다.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노화가 일찍 왔다. 까맸던 털이 회색으로 바랬다. 중학생이던 내가 커서 어느덧 군대에 갔다. 훈련소에서 엄마 편지를 처음 받았다. 입대한 날부터 편지 쓰는 그날까지 또또가 밤만 되면 문 앞에 우두커니 앉아 나를 기다린단다. 형아 이제 당분간 집에 안 온다고 그렇게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듣는단다. 예민한 또또는 겨우 열 살 남짓 살고 죽었다. 상병 계급장 달고 오랜만에 휴가를 나왔다. 집 벨을 누르는데 개 짖는 소리가 없이 잠잠하다. 또또 어디 갔느냐 물으니 엄마가 난처해한다. 몇 달 전에 아팠고 소파에서 내려오다 떨어졌단다. 급하게 병원에 데려갔는데 이미 차갑게 식었다. 군대 있는 내가 심란해할까 싶어 얘기하지 않으셨다. 병원에 위탁해서 장례를 치러줬다. 또또 없는 집안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전역하고 복학했다. 동생은 구청에서 공익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거나하게 마신 술에 취해서 집 문을 여는데 안에서 개가 짖는다. 만취가 됐더니 헛소리가 들리는구나 싶었다. 헛것도 보인다. 죽은 또또 만한 크기의 강아지가 달려와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요크셔테리어 견종이다. 공익요원 동생은 백화점 앞 사거리에서 불법 주정차를 단속한다. 며칠 전 사거리 일대가 자동차 경적 소리로 시끄러워서 동생이 달려갔다. 거기에 웬 강아지가 위태롭게 우왕좌왕하고 있더란다. 주인 잃은 개인가 싶어 구청 사무실로 데리고 와서 며칠 있었다. 그러면서 주인을 백방으로 찾았다. 끝내 내 개요, 하는 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내일이면 유기견 보호센터로 갈 운명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동생이 데리고 온 개이니 작명의 권한도 일임했다. 숙려 끝에 ‘구찌’라고 이름 지었다. 주인 잃은 개지만 명품처럼 기르겠다는 각오를 담았단다.
구찌는 영리하지만 예민하지 않았다. 엄마는 또또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런 엄마의 결심을 구찌가 무너뜨렸다. 동생이 엄마에게 이따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가겠다고 뱉어놓고 집에 와서 풀어놓았다. 거실과 주방 여기저기를 킁킁 코로 좇다가 문이 살짝 열린 욕실로 들어가더란다. 엄마가 뭐 하나 가봤더니 욕실 구석에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더란다. 똥오줌 못 가릴 걱정은 접어도 되었다. 머리도 좋았다. 산책 가자고 목 끈을 펼치고 있으면 스스로 와서 다리를 넣는다. 성격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따르고 좋아한다. 어지간해선 이유 없이 짖지도 않는다. 잘 없는 일이지만 말썽을 부려서 혼을 내도 이름만 부르면 금세 풀어져서 꼬리를 흔든다. 또또는 그렇지 않았다. 삐치면 불러도 오지 않았다. 구찌는 필경 좋은 데서 태어나고 자란 개였다. 전 주인이 누구인지 아주 버릇을 잘 들였다. 구찌 엄마 아빠도 좋은 개였을 거다. 혈통부터 남달랐다.
장가를 가고 본가에서 따로 나와 살았다. 구찌는 어쩌다 본가에 갈 때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딸아이가 태어났다. 구찌에 대한 내 애정은 단번에 저기 뒤 순서로 밀려났다. 그래도 구찌는 잘 지냈다. 엄마는 이따금 또또와 구찌를 비교했다. 또또는 예민해서 오래 못 산 것 같다. 구찌 봐라, 성격 완만하니까 얼마나 건강하냐. 사람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 받으면 건강 해치고 오래 못 산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둥글둥글 구찌처럼 살아야 오래 산다. 구찌는 엄마의 건강학 표본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엄마도 동년배에 비해 젊고 건강하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성질이 모나고 돌출되어서 글러먹었다. 성격 좋은 구찌는 열다섯 살 무렵까지도 쌩쌩하고 건강했다. 내가 주는 관심이 이전만 못했지만 섭섭해하지 않았다. 직접 말로 들은 적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열여섯 살이 넘어가니 늙는 게 보인다. 소파에 오르는 데 시간이 걸린다. 단번에 오르지 못한다. 병원에서 말하길 관절에 무리가 갈 수 있단다. 사람이 들어서 오르고 내려주란다. 털 빛깔도 젊을 때와 다르다. 금발로 반짝거리던 모발이 많이 허옇게 샜다. 윤기도 죽어서 푸석해 보인다. 활동량도 줄었다. 산책 나가도 얼마 못 가서 지친다. 안아 달라고 겅중겅중 솟는다. 자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릴없이 자고 또 잔다. 이빨도 빠졌다. 질기고 딱딱한 음식은 주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이름을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는다. 잘 들리지 않는 게 분명했다. 시력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에 간식을 놓아줘도 얼른 찾지 못한다. 후각으로 더듬어 겨우 먹는다. 분변도 가리지 못하게 됐다. 어릴 때는 좀처럼 그런 법이 없었는데 여기저기 실수를 한다. 엄마가 안쓰러워하며 치우신다. 이유 없이 끙끙거리다가 허공에 대고 짖는다. 눈은 더 나빠져서 자꾸 집안 모서리에 부딪친다. 들어서 안구를 보니 색깔이 탁하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백내장도 왔단다. 이제 식구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아니, 외부의 자극과 단절되어서 자기 세계 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힘겹게 밥을 먹고 더 힘들게 용변을 본다.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고되다.
병원에 데려갔더니 알츠하이머, 치매라는 진단명이 나왔다. 이미 많이 진행됐단다. 이제 구찌 안에 사랑하는 가족의 기억은 더 남아있지 않단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육신만 남아서 생명의 유지를 위한 본능에 이끌릴 뿐이란다. 문제는 그 과정이 개도 사람도 무척 고통스럽다는 점이다. 선생님이 머뭇거리며 말씀을 꺼냈다. 쉽지 않은 결정이겠습니다만, 이 정도 되면 주인께 안락사를 권합니다. 결정만 하시면 최대한 편안하게 잠들 듯이 아이를 보내주겠습니다. 집으로 와서 엄마, 아부지, 동생이 심각한 논의를 거듭했다. 엄마랑 아부지는 결론을 내렸고 동생이 망설였다. 그렇게 며칠을 더 지냈는데 그동안에도 구찌는 상태가 계속 나빠졌다. 동생도 결심을 굳혔다. 나한테는 그렇게 본가 식구 셋이 마음을 모았다고 알려주는 전화가 왔다. 나는 의견 따위를 가질 수 없었다.
동생과 엄마가 구찌를 마지막으로 병원에 데려갔다. 차에 태워 가면서도 엄마는 하염없이 울었다. 주사 약물이 들어가는 동안 동생이 구찌를 안아주었다. 병원에 화장 절차를 위탁했고 결과로 사진을 받아보았다. 그렇게 구찌를 보냈다. 열여덟 살, 사람 나이로 치면 구십 살도 넘게 산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우리 집 수십 년의 애견생활이 끝났다. 그 뒤로 개는 기르지 않는다. 당시 서른 살 중반도 넘은 동생은 출근만 겨우 하고 열흘도 넘게 두문불출했다. 엄마 말로는 방문을 닫고 매일 울더란다. 내일모레 마흔 살 아저씨가. 본가 개 냄새가 지워지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본가에 가면 문득 개 냄새가 코언저리를 스친다.
딸아이가 가장 크게 바라는 소원이 있다. 언젠가 아이와 나란히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알려주었다. 이럴 때 소원 빌면 이루어진다고. 그랬더니 망설임 없이 소원이 튀어나온다. 손을 모으고 눈을 질끈 감더니 “강아지 기를 수 있게 해주세요!” 외친다. 아이는 하얀색 포메라니안을 키우고 싶어 한다. 아내는 결사반대다. 강아지 키우는 게 애 키우는 거랑 똑같은 건데 아이더러 네가 밥 먹이고 똥 치우고 씻길 거면 그러란다. 아이는 또 호기롭게 자신 있다고 하지만 영 못 미덥다. 그렇게 유야무야 된 소원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나도 선뜻 내키지 않는다. 비겁한 애견생활을 다시 시작할 자신이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웹툰을 안다. 작가는 예쁜 삽화와 더불어 이런 얘기를 남겼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때 나옹(작가가 먼저 보낸 반려묘)에게 물어볼 것이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했어? 응 그건 말이지.. 그때 되면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 반려동물과 함께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내용이다. 나도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다만 이다음에 구찌가 나한테도 마중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장가가서 아이 낳고 따로 사느라 자기는 뒷전이었다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구찌는 성격 좋고 뒤끝 없으니까 미안했다는 내 말에 금세 풀어져서 또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 것이다. 그때서야 충실한 애견생활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