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인생이다. 하루 24시간 중 전철에서 두 시간 이상을 보낸다. 적지 않은 비중이다. 전철 객실 안에서 쓰는 시간은 삶의 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많은 회사 동료들이 전철이며 버스, 대중교통 이용하는 데 적잖은 시간을 들인다. 회사와 집이 모두 서울인 직원이 점차로 줄어간다. 몇 해 전 늦장가 간 동창 녀석은 어찌어찌 서울 회사 근처로 신혼집을 얻었다. 계약 연장이 안 돼서 결국 수도권으로 이사를 갔다. 녀석 아버님이 굴지의 대기업 임원 출신이다. 그런 집 아들내미도 강남권 전세금 인상폭은 감당이 안 된다.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려면 ‘저녁을 대중교통 안에서 다 보내지 않는 삶’이 전제조건이다.
삶의 질에는 수면도 중대한 요소가 된다. 어제 잠을 설쳤다. 이런 날이면 하루 종일 몸이 무겁다. 쉬 무력감이 든다. 응급 처치가 시급하다. 전철 안에서 모자란 잠을 채우면 그나마 낫다. 가끔 천정 손잡이를 잡고 선 채로 자면서 가는 사람도 있다. 전철 안에는 다양한 재주를 가진 기인이 많다. 난 균형 감각이 안 좋아서 시도하지 못한다. 그저 곧 내릴 것 같은 승객 앞에서 낌새를 살핀다. 전철 좌석 일곱 개 가운데 여섯 명이 눈을 감고 있다. 개중 딱 한 사람만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이동 시간이 길지 않을 확률이 높다. 아니면 어젯밤 나와 달리 숙면을 취했거나. 다행히 전자였다. 오예, 쾌재를 부르며 냉큼 자리에 앉았다. 운수 좋은 날이다.
현진건 선생께서 붙이신 「운수 좋은 날」이란 제목은 지독한 반어법이다. 나의 아침이 그렇다. 잘 자고 있던 옆 사람이 화들짝 놀라서 내린다. 그 덕분에 방금 탄 여자 승객이 수혜를 입었다. 삼말 사초, 아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화장품 냄새가 심하다. 난 눈이 많이 나쁜 대신 청각이 예민하다. 후각은 그냥 그렇다. 만성 비염이 있어서 어쩌면 보통에 못 미칠 수도 있다. 그런 내가 심하다 느낄 정도면 객관적으로 지나친 것이다. 냄새만으로도 쪽잠의 실행이 가능할지 미지수다.
수혜자 여성 승객이 전화를 건다. 스피커폰 모드처럼 소리가 새어 나온다. 전철은 문을 자꾸 여닫아서 출발을 못할 만큼 만원이다.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이 외려 정숙하다. 고된 출근길 각자도생의 현장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밀지 마세요, 내릴 게요 정도의 외마디만 이따금 들린다. 편안하게 착석에 성공한 사람의 한가한 전화 통화는 당연히 눈총을 받는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챙겨 오지 않은 나는 그 통화를 바로 옆에서 듣는다. 나이만 아내와 비슷할 줄 알았는데 처지도 다르지 않다. 초등학생쯤 되는 자녀를 둔 워킹맘이시다.
삼십 분 넘게 통화를 한다. 쪽잠은 물 건너갔다. 아주 내가 그 전화기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 집 아이는 등교 준비 중이다. 아니 준비 중이었다가 방금 등교 중으로 바뀌었다. 아이가 집 근처 학교까지 걸어간다. 엄마가 그렇게 이동하는 중에도 내내 말동무가 돼준다. 우리 아무개, 숙제는 다 해쩌여? 옷은 따뜻하게 입어쩌여? 피아노 학원은 재밌어쩌여? 횡단보도는 잘 건너고 이쩌여? 혀 짧은 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인내가 역치를 건드린다. 다른 승객들도 하나둘 눈을 흘긴다.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건 아니다. 생때같은 자식 떼어놓고 일터에 나가는 엄마 마음이 오죽할까. 엄마 손이 한창 필요한 때다. 집에 두고 온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만원 전철인데 운 좋게 자리에 앉았다. 옳다구나, 이 때다 싶어 휴대전화를 든다. 직접 챙겨주지 못한 것을 말로 물어서라도 확인한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일 것이다. 엄마의 빈자리가 서운할까 싶어 등굣길 말동무라도 되어본다.
그렇더라도 삼십 분도 넘는 통화는 심했다.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으면 이상 없음만 확인하면 될 일이다. 사회 규범은 흔한 말 중에 있다. 용건만 간단히! 가뜩이나 붐비는 전철 안에서 불필요한 소음이 섞인다. 누구는 저렇게 힘들게 서서 가는데 편하게 앉아서 통화를 나눈다. 워킹맘 승객의 진정성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전화 초반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모성애도 희석된다. 의미 없는 잡담처럼 변한다. 가만 보니 이 아주머니, 한두 번 이런 게 아닐 것 같다. 매일 아침 전철 객실 안에서 이랬을 것처럼 유유자적하다. ‘운 좋게’ 내가 오늘 처음 맞닥뜨린 것이다.
아이가 뭘 배울까 싶었다. 서툴다 못해 무자격 아빠지만 일상의 여러 순간이 훈육의 재료가 된다고 믿는다. 솔선수범은 자녀 앞에서 가장 절실하다. 세대의 전승을 통한 진화가 그래서 가능하다. 늘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 된다. 그러면 그 아이가 자라서 대체로 좋은 사람이 된다. 청출어람의 씨앗이 모든 가정에서 움튼다. 만원 전철의 워킹맘은 오늘 훌륭한 교육 보조재를 낭비했다. 길게 통화를 이어갈 게 아니라 아이가 등교 준비를 잘 마쳤는지 그것만 확인하고 끝냈어야 옳다. 그래, 우리 아무개 엄마 없이도 준비 잘했구나, 착하네, 엄마 지금 사람 많은 전철 안이니까 이따가 또 전화할게요, 사랑해. 이런 전화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일 아침 오늘 같았다면 아이의 의식 저간에는 이런 명제가 성립됐을 수도 있다. 공중도덕이란 거 쓸모없는 거구나, 나만 편하면 되는 거구나, 내 뜻대로만 행동해도 아무 문제없구나. 등교 시간 엄마와의 긴 전화통화로는 절대로 자립심을 기를 수 없다는 것쯤은 새삼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통화 좀 짧게 마치시죠, 라고 실행 직전에 최종 시뮬레이션을 한다. 그때 워킹맘이 갑자기 일어선다. 출입문 방향으로 인파를 헤치며 비로소 휴대전화를 끈다. 아오, 약 올라. 마침 딱 일어나네. 오호라, 여기서 내리시는구만. 일어나고 이동하고 전화 끊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속동작이다. 역시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숙련된 헤비 토커(Heavy talker)다. 와, 이렇게 퇴장한다고? 주변 시선 아랑곳없이 맘대로 통화하고선?
사소한 감정 소모 중에 내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깜짝 놀라서 수신 버튼을 옆으로 민다. 모친이다.
- 응, 엄마, 아침부터 어쩐 일이시래.
- 어, 아니 손녀딸 오늘 학교 가는지 물어보려고.
딸아이 학교에 가는지 묻는 전화다. 아이 학교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서 며칠 등교를 쉬었다. 그게 궁금해서 이른 시간에 전화하신 거다.
- 아, 학교 오늘부터 가고 나 전철 안이니까 이따 내려서 다시 전화할게요. 응, 끊어.
아오! 이 장면을 옆에 워킹맘에게 여봐란듯이 보여줬어야 하는데! 이것 보시오. 대중교통 안에서 전화는 이렇게 하는 거란 말이오! 용건만 간단히! 이제 아시겠소! 하, 이랬어야 되는데 얄밉게 방금 전 내려버렸다. 성인의 재사회화를 위한 훌륭한 보조재였을 것을. 적어도 나는 어릴 때 우리 모친에게 잘 배웠다. 이웃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 수오지심, 스스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나는 이 정도면 어찌어찌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자란 것 같은데 문제는 딸아이다. 다른 방법이 없지 뭐.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운수 좋은 날! 오늘도 아자 아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