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과 오찬

by Hoon

엘리베이터를 동승한 본부장이 말한다.

- 참 낼모레 사장님이랑 장기근속 사원 중에 추려서 점심식사 하기로 돼있는데 Hoon 팀장도 참석 대상이래. 그날 점심 약속 따로 없지?

- 앗, 제가요? 예,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 자리가 있는지 몰랐다. 내가 간다는 건 상상 밖이다. 어떻게 내가. 실은 사장과의 식사가 처음은 아니다. 나라에서 큰 사업 승인을 받아냈을 때 격려 차원에서 수고한 직원들을 모았다. 몇 해 전 개국 기념일 때도 호출됐었다. 그런 때는 식당을 통째로 빌렸다. 참석 인원이 모두 해서 기십 명도 넘었다. 나는 그야말로 ‘원 오브 뎀(One of them)’이었다. 사장은 저기 테이블 다른 줄 가운데 앉았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오후에 비서실에서 문자를 보내왔다. 사장 주재 오찬의 일시와 장소, 참석자 명단이 담겼다. 머릿수를 세어보니 전부 아홉 명이다. 엥? 겨우 그게 다라고? 부담된다. 아니 전에는 수십 명 부르더니 이게 웬 일이래. 코로나 여파로 짐작한다. 그 정도 인원 규모 안에서는 원 오브 뎀이기 어렵다. 무슨 짓을 해도 눈에 들어온다. 피할 곳이 없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급체라도 안 하면 다행이다. 회사원 가운데 상사와의 식사 자리가 기꺼운 이가 몇이나 될까. 그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 대표이사다. 그것도 전문 경영인, 나랑 같은 월급쟁이 사장이 아니라 오너다. 우리 집 생계의 생사여탈권, 그 전권을 행사하는 권력자다. 이거 문제가 심각해진다.


대학생 때 연합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봄가을로 큰 행사가 있다. 회비로만 비용 충당하기가 어려워서 후원금을 모은다. 어떻게 모으느냐. 행사 브로셔를 만든다. 거기 몇 페이지를 학교 앞 상점가의 술집, 음식점, 당구장, PC방 광고로 채운다. 그걸 명분으로 몇 만 원의 후원금을 내주십사 주인장과 담판을 짓는다. 관례가 된 방법대로 모금을 하는데 동아리 회원들 실적이 영 부진하다. 내가 나서기로 한다. 묘하게 똑같이 술집이며 식당에 들어가도 주인들이 유독 나만 알아본다. 나보다 더한 단골이 따로 있는데도 그렇다. 심지어 겨우 두 번째쯤 가보는 곳에서도 반색이다. 네가 기억에 확 남는 인상인가 보다, 친구들 말을 들으며 멋쩍게 유리창에 비쳐 본다. 아쉽게 생긴 얼굴 하나가 그 너머에 있다. 후원금 모금 최고 실적을 달성했다. 행사도 성료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따금 그런 경험을 한다.


아내와 후배의 분석을 참고한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위와 유사한 사례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먼저 아내의 풀이는 이렇다. “오빠가 인상이 세기는 해. 잘 생긴 건 아닌데 특징적인 얼굴인 건 맞아. 나도 오빠 처음 봤을 때 그랬거든. 키는 조그만데 눈빛이 또랑또랑하더라고. 머리 스타일이며 옷 입은 거며 유행 따위 전혀 신경 안 쓰는 타입 같았어. 기본적으로 상냥한데 아니다 싶으면 또 장난 아니잖아. 손님 중에 그런 사람이 잘 없나보지.” 후배는 다르게 분석한다. “제 생각엔 형이 인사성이 좋으셔서 그런 것 같아요. 사무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한테도 그러시고, 로비 보안직원들한테도 인사 잘하시잖아요. 형 술 먹으러 가면 사장이나 홀 직원들한테도 그렇던데. 전 귀찮아서 잘 안 그러거든요.” 음, 요식업으로 한정하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행동은 한다. 손님 붐벼서 가게 손 없다 싶으면 나는 주인장한테 말하고 내가 가져다 먹는다. 물병, 술병, 밑반찬 할 것 없이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태고부터 인류가 체득한 생존의 요령이다. DNA에 새겨진 종의 본능이기도 하다. 군 입대할 때 우리네 어머니들이 늘 하시는 말씀이다. 너무 잘하지도 말고, 못 하지도 마라. 중간만 하는 게 최고다. 몰개성 속에 자신을 숨겨야 쓸데없는 수고를 면할 수 있다. 튀면 손해를 본다. 피해를 입는다. 육식성 어종이 군집을 이루는 작은 치어를 먹이로 좇는다. 은빛 덩어리로 뭉쳐 이리로 저리로 우르르 피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안으로, 안으로 숨어야 살아남는 확률이 높아진다. 육지 위 인간의 생활사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서글프다.


행여 늦을까 서둘러 식당으로 간다. 자리 배치가 정해져 있다. 나는 사장 정면 바로 옆 자리다. 사정권 안이다. 하긴 의자 아홉 개가 다다. 어디에도 사각지대는 없다. 쏘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조준 사격이 가능하다. 그래 어차피 뭔 일이 있으려면 어떻게 막아도 생긴다. 아니지, 겨우 밥 한 끼 먹는 건데 무슨 큰일이 있으려고. 오너와의 점심이 뭐 대수냐. 'H-아워(H-hour : 작전 개시 시각)'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식사에 초대된 다른 직원들이 하나 둘 모인다. 마침내 사장님 입장. 상석으로 안내하고 외투를 받아 들려고 했다.

- 사장님, 옷 주시면 걸어 드리겠습니다.

- 아니에요, 내가 할게요. 괜찮아요.


에잇, 안 하던 짓 하려다 망했다. 겸연쩍게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으레 날씨 얘기가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을 맡는다. 대차게 추운 날씨가 아이스를 브레이킹한다니, 아이러니하다. 사장 말하길, 시간이 참 빠르다, 벌써 개국한 지가 이렇게 됐다, 개국 날 생겨난 크고 작은 에피소드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과하지 않게 웃는다. 여기가 확실한 포인트다 싶은 타이밍에는 부러 파안대소한다. 코스로 준비된 음식이 하나 둘 나온다. 접시는 이따 만 한데 안에 음식은 애걔 조막만 하다. 보기엔 예쁜데 맛을 모르겠다. 유명한 식당에 실력 있는 요리사가 만든 것일 테니 맛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맛을 못 느끼는 거다. 부인, 딸아. 아빠 이렇게 열심히 회사 생활한다. 수신될 리 없는 텔레파시를 보낸다.


테이블 두 개를 길게 붙였는데 저 쪽에 비교적 어린 직원들이 앉았다. 나의 현재와 너무나 다르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 맞나. 저들은 확실히 미각이 살아있다. 나오는 음식 하나하나 맛있게 음미한다. 사장의 얘기에 스스럼없이 반응한다. 진짜 재밌다 싶은 지점에서만 웃는다. 그냥 웃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보탠다. 예, 사장님, 전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와우, 놀랍고 대단하다. 저것이 뉴 제너레이션의 패기인가. 무얼 하든 억지스럽지 않다. 스스로 어색하지 않으니 자연스러운 리액션이 가능하다. 한 마디 못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사장의 이야기 중간 휴지기에도 저들끼리 거슬리지 않게 말을 주고받는다. 능력자들이다.


무사 무탈하게 식사가 끝났다. 중간에 “Hoon 팀장, 이거 좀 더 들어요.”하며 사장이 직접 내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던 순간에는 몸 둘 곳을 모르고 조아렸다. 급하게 입력하신 걸 수도 있지만 내 이름을 알긴 하시는구나, 황송했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어딘지 못마땅하다. 요즘도 그런 은어가 통하는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짜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가. 아, 왕년의 Hoon 이렇지 않았는데. 어딜 가도 존재감 뿜뿜에 뇌리에 때려 박는 인상의 소유자가 바로 난데. 내가 낸데!


본래의 나로 돌아가기로 한다. 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오늘처럼 찌그러져 있지는 않기로 한다. 내 스타일이 원래 그거다. 진인사면 대천명!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하늘의 부름을 기다린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다. 상관의 눈을 피하겠다고 부러 납작 엎드릴 필요도, 또 눈에 들겠다고 날 좀 보소 ‘오버’할 까닭도 없다. 조직 구성원으로서 소임을 충실히 하고 인사권자 앞에서 스스로 떳떳하면 될 일이다. MZ 세대의 당당함을 그들의 전유물로만 맡길 수 없다. 사필귀정이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것으로 돌아오게 돼있다. 묵묵히 내 일을 잘하고 있으면 오너가 어련히 알아봐 줄 거라 믿는다. 물론 약간의 데커레이션이나 가니시(Garnish : 주 요리를 꾸미기 위해 곁들인 장식)가 필요함을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지엽말단이 본질을 압도할 수는 없다.


어쩌면 사장도 이런 식사 자리가 편하지 않을 수 있겠다. 사람은 비슷하다. 나라님도 촌부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사장도 마음 편한 사람들과 편안한 밥 한 끼가 훨씬 좋을 것이다. 아랫사람 눈치 보는 것도 눈치다. 의식하고 신경 써야 하는 직원들 식사 자리보다 얼른 퇴근해서 여우 같은 아내, 토끼 같은 자식들이랑 나눠 먹는 된장찌개가 훨씬 맛날 터이다. 리더로서의 권위, 상급자로서의 체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머 감각 없는 어른이라는 평을 듣지 않으려면 적잖이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귀가해서 아내와 일과를 공유했다. 사장이 부른 점심 식사 자리에 갔었다니까 애쓰셨네 말한다. 그러면서 눈도장은 제대로 찍고 왔겠네, 그럼 사장님이 이다음에 안 자르려나 한다. 내가 답한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쓸모없어지면 용도 폐기되는 거지. 말하면서도 씁쓸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오늘 살짝 눈도장 찍은 게 맞다면 그게 잘된 일인가, 그렇지 않은 건가. 공연히 눈에 들어서 혹시 잘못이라도 하면 더 엄벌에 처하는 거 아냐?!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잘할 생각 안 하고 그르칠 것부터 걱정하네. 그리고 이게 맞지. 진인사 대천명! 사필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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