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이용해 딸아이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간다. 2년 전에 처음 안경을 씌웠다. 그새 눈이 더 나빠졌다. 시각 기관의 이른 퇴행, 그것은 안타깝게도 유전이다. 친할머니로부터 받아서 아빠가 물려준 것이다. 좋은 것만 물려주고 싶은데 유전 형질의 우성 발현은 ‘좋은 것’만 일어나지 않는다. 딸아이는 이따금 얘기한다. 키 작고, 눈 나쁘고, 이 안 좋고, 안 좋은 건 다 아빠한테 받았다고. 글 쓰는 할아버지로부터 3대째 이어받은 언어 감각, 그림까지 잘 그리는 예술적 재능, 아빠가 보탰을지도 모르는 미장센의 실현 능력, 기타 논리력 추리력 같은 장점은 거론하지 않는다. 좋은 건 다 엄마한테서 온 거다. 무던한 성격, 우수한 친화력, 그것으로 인한 ‘인싸(Insider) 라이프’는 엄마 유전자라고 믿는다. 나는 애써 논쟁하지 않는다.
시력 검사를 새로 했다. 딸아이 마음에 드는 안경테도 어렵지 않게 골랐다. 완성되는 데 한 시간 이상 걸린다. 딸아이와 나는 근처 만화카페에 가기로 한다. 아이 엄마는 따로 피트니스 센터에 가겠단다. 여기서 헤어진다. 아내는 운동 갔다가 곧장 집으로 온다. 딸아이와 내가 안경을 찾아서 집에 간다. 만화카페에 가서 두 시간 이용권을 끊었다. 아이는 능숙하게 전에 보던 만화책을 꺼내온다. 난 어디까지 봤더라. 여기서부터 보시면 됩니다, 하고 알려주는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 아이와 나란히 앉아서 각자 만화 세상으로 몰입한다.
한참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얼른 받는다. 아내다.
- 어, 부인 어쩐 일로?
- 오빠, 이따 안경점 가면 우리 응대했던 직원 이름 좀 알아다 줘.
직원 이름? 그건 왜, 하고 물었다. 아내가 얘기한다. 아까 안경점 나와서 걸어가는 길에 생각했는데 몹시 기분이 나쁘더란다. 다시 뭐가? 하고 물었다. 안경점 직원이 아이 눈 나빠진 것 갖고 자꾸 엄마 탓을 하며 훈계를 하더란다. 듣고 있으려니 혼나는 기분까지 들더란다. 자기 일에 진지한 건 좋은데 주제넘게 심각하게 굴더란다. 음, 아마도 내가 밖에 있는 사이 시력 검사실에서 일어난 일인가 보다. 나도 싸한 느낌은 있었다. 검사실에서 나오며 아내가 직원에게 아이 시력이 얼마냐고 다시 물었다. 직원이 “나안 시력이요, 교정시력이요?” 반문했다. 아내가 맨눈으로 쟀을 때 어떻게 나왔느냐 재차 물었다. 직원은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교정시력이 관건인데 지난번보다 많이 높였어요.” 한다. 어깨너머로 들었던 나도 갸웃하긴 했다. 저 직원 말투와 태도가 좀 뭣하네.
이름은 왜 필요한 거냐고 아내에게 다시 물었다. 아내는 곱씹을수록 불쾌해서 안경점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른 직원이 받았다. 아내가 점장이나 책임자를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직원은 점장이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다, 용건이 있으면 대신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아내가 서비스 불만족을 한참 토로하는 사이 엉뚱한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프랜차이즈 본사 고객 게시판에 올려야겠구나 싶었다. 어디 어디점 직원 아무개 씨 고객 응대 교육 다시 시키라고 할 참이었다. 그러려면 이름 석 자를 알아야 한다. 남편에게 그걸 알아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아내를 진정시킨다. 기분 나쁜 건 알겠다, 이름 알아오는 것도 어려운 거 아니다, 근데 난 좀 그렇다, 그럴 거였으면 나랑 미리 교감을 하든가 했어야지 거기서 그렇게 먼저 저질러버리면 어떡하냐, 좀 이따 안경 찾으러 가는 건 난데 곤란한 상황이라도 겪으면 어쩌냐고 아쉬운 말을 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날카롭게 나온다. 오빠는 지금 오빠 걱정이냐, 와이프가 남한테 불쾌한 일을 당했으면 먼저 걱정해주고 공감을 해줘야지, 내 편이냐 남 편이냐 따진다. 아, 쒸, 이게 아닌데. 얘기가 또 묘한 방향으로 흐른다. 왜 불똥이 나한테 튀냐고! 그러고 있는데 만화카페 주인장이 내 쪽으로 와서 눈치를 준다. 통화는 밖에 나가서 해주세요. 왐마, 만화책 잘 보다가 봉변이네. 아니 주인장 양반도 저기 교복 입은 애들 떠들고 뛰어다닐 때는 암말도 못하셔 놓고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확 성질 같아선 아오!
밖으로 나가서 통화를 잇는다. 부인, 왜 안 하던 짓 하냐고 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뒤통수를 때린다. “오빠랑 오래 사니까 오빠한테 배웠나 보지!” 두둥! 이건 또 뭔 소리. 이것도 내 탓이야? 안 좋은 건 다 나 때문이다. 아내 말은 이렇다. 오빠는 극도로 까칠해서 타인에게 엄격한 사람 아니냐. 특히 식당이나 가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냥 못 넘어가지 않느냐. 나처럼 나중에 전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얘기하지 않느냐. 나(아내)는 본래 손해 봐도 참고 말 못 꺼내는 성격인데 언젠가부터 이건 아니지 싶었다. 그래서 오빠처럼 한 거다. 아니, 그래도 상황과 경우를 봐가면서!.. 라고 얘기하려다 도로 넣었다. 지금은 논박이 필요한 타이밍이 아니다.
아내와 통화를 마무리했다. 잘 알았고 직원 이름을 알아갈 거다, 안경도 잘 찾아가겠다고 일러두었다. 만화카페에서 나왔다. 안경점 문을 열었는데 두 시간 전과 미묘하게 공기가 다르다. 담당 직원 말고 내 또래 남자가 맞이한다. 명찰 이름 앞에 ‘점장’이라는 작은 글씨가 붙었다. 별다른 말없이 자기 할 일만 한다. 안경을 아이에게 씌워 느슨하거나 조이지 않는지 본다. 불편한 데 없냐는 질문에 아이가 끄덕거린다. 새 케이스를 받아 든다. 안경은 그냥 쓰고 간다. 나가는 길에 아내의 심기를 건드린 직원 옆을 일부러 지난다. 그러면서 왼쪽 가슴팍을 노려본다. 아, 무, 개! 봤다 그 이름 세 글자!
집에서 아내와 다 못 나눈 얘기를 매조진다. 오빠 없을 때 그 직원이 이상하게 삐딱하게 굴더란다. 나도 맞장구친다. 그래, 그 사람 좀 이상하더라. 과하게 상냥한 건 바라지 않는데 기본적으로 좀 뻣뻣하더라. 안경사로서 직업적 자존감 높은 건 알겠는데 함부로 손님을 가르치려고 들더라. 심지어 꾸중하는 인상을 주니 말 다했지. 왜 식당 가면 드물게 그런 주인장 있지 않느냐. 자기가 만든 음식에 자부심이 넘쳐서 손님 홀대하는. 테이블에서 익히는 데 함부로 손 못 데게 하고, 그건 좋은데 먹는 요령까지 통제하려고 들고. 우리끼리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옆에 붙어서 요리에 들어간 재료, 유별난 조리법 자랑하고. 고객보다 우위에 있으려고 하는 주인장. 손님이 왕은 아니지만 최소한 하대하면 안 되지. 더군다나 그 안경사는 워킹맘 엄마의 자격지심과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한 소리 들어도 싸다. 그 점장, 아니 그 안경점 자체가 글러먹었다. 항의 전화를 했으면 책임자가 사과라도 했어야지. 그 점장이란 사람 나한테도 일언반구 없더라. 아내에게 최대한 공감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부인, 이런 건 나 안 닮아도 돼. 까칠한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우리 집에 꼬장꼬장한 사람은 나 하나로 충분해. 부인은 원래 캐릭터대로 살아. 악역은 내 몫이니까. 부인까지 나서면 우리 싸움닭 부부로 소문 나. 그럴 필요까진 없잖아. 이게 사람이 이렇게 되네. 부인이 까칠한 역할을 하니까 내가 다독이고 너그럽게 되네. 이렇게 균형을 찾는 건가. 그럼 십삼 년 동안 부인이 내 뒤에서 노심초사했겠네. 겪어보니 알겠네 알겠어. 그래도 내가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잖아. 명분과 논리가 타당할 때만 싸우려고 들잖아. 그러면서 절대로 도리와 예의를 져버리지 않잖아. 최소한 욕지거리는 안 하잖아. 차분한 말로 안 통한다 싶을 때만 비로소 고성 발사하잖아. 그것도 끝까지 갔을 때만. 나 그렇게 막 돼먹은 사람은 아니잖아. 어느새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부부는 닮는다. 어쩔 수 없이. 맨살 부대끼며 평생 사는 데 당연하다. 자석에 붙여놓은 쇠붙이도 그대로 두면 저절로 자성을 띤다. 부부는 그렇게 일방의 관계도 아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모르는 사이 내가 아내를 따라 하고, 아내가 나처럼 행동하고 사고한다. 자녀가 있는 집은 또 그 아이가 물리적 실체가 된다. 아이는 엄마 아빠의 면면을 고르게 흡수한다. 엄마 아빠의 온전한 교집합이다. 그래서 애들 앞에서는 냉수도 함부로 못 마신다고 하나 보다. 부부 얘기로 돌아간다. 이따금 티브이에서 남매처럼 꼭 닮은 부부를 본다. 와, 부부는 닮는다더니 진짜 그렇구나. 어쩌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이목구비가 닮은 사람이 친근함에 서로 끌린 것일는지 모른다. 에잇, 신성한 부부 담론에 불경한 자연 과학, 사회 과학은 끌어들이지 않기로 한다. 그러면서 아내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저 얼굴에도 슬슬 내가 보이려나? 그러면 저 사람이 훨씬 손해인데. ㅎㅎ
좋아도 내 사람이고 싫어도 내 사람이다. 까칠하고 모난 내 모습을 닮는대도 그 또한 내 운명이고 팔자다.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대신에 내가 좀 둥글둥글 완만해지기로 한다. 나도 이제 그렇게 살 나이도 됐다. 아내에게 안경점 직원 이름 알아왔다고, 어떻게 할 셈이냐고 물었다. 아내가 말한다. “확 이름 올리면서 직원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할까 했는데, 말지 뭐. 아무래도 그런 건 나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이런 건 오빠나..” 내가 말 허리를 자른다. 나도 그렇게까지는 안 해! 오해야, 오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