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뿔 한우는 행복할까. 소고기 품질을 등급으로 나눈다. 소식하고 운동 많이 한 건강한 소가 최고 등급이냐. 그렇지도 않다. 근육 사이에 지방질이 촘촘하게 침투해서 사람 입맛에 기름기가 고소하게 도는 고기가 최상품이다. 많이 먹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은 소를 으뜸으로 친다. 건강한 소일 수 없다. 안타까운 건 최고 등급인 ‘투 플러스 A 등급’, 표기하자면 ‘A++’ 등급 소도 자신이 살아있을 때는 자기 등급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죽어서 살 속을 갈라보아야만 알 수 있는 나의 등급. 살아있는 동안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나의 등급. 죽어서 혼백이 된 투뿔 한우는 늦게라도 행복했을까.
인사 평가 시즌이 돌아왔다. 일 년에 두 번. 단 한 번도 반가웠던 적 없다. 팀원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팀장이 된 지금도 다르지 않다. 어른 되면 학생처럼 평가받을 일이 다시는 없을 줄 알았다. 웬걸. 학교 다닐 때와 똑같이 여섯 달마다 한 번씩이다. 음모론을 제기한다.
우리 회사 평가 체계는 이렇다. 알파벳 A부터 E까지 5단계로 등급을 매긴다. 상대 평가다. 팀 인원수에 따라 등급을 배분한다. 배분 비율은 미리 정해져 있다. 가령 팀장 빼고 팀원 일곱 명인 팀은 A와 B 등급 각 한 명에 C 등급 네 명, D 등급 한 명인 식이다. 특정 인원 규모가 넘어가면 최하 등급인 E 등급도 최소 한 명 이상 부여해야 한다. 팀장이 1차, 상급자인 본부장이 2차 평가를 맡는다. 점수로 계량하는 기초 평가가 끝나면 평가 등급이 우선 자동으로 배분된다. 팀장은 본부장에게 제한적으로 팀원 일부 등급을 올려 달라, 혹은 내려 달라 요청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비율도 제한돼 있다. 여러 팀장이 동시에 요청하면 본부장으로선 숙려할 수밖에 없다. 아, 천만다행으로 상향 평가나 다면 평가가 없다. 그랬다면 팀장인 나는 E 등급 획득을 도맡았을 게다.
금년 하반기는 큰 업무 과실 없이 비교적 안정적인 성과를 거뒀다. 팀원 모두가 각자 임무에 충실했다. 동료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분명 기분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평가 등급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줄을 또 세워야 한다. 나도 다른 팀장들과 줄 서야 하지만 차라리 남의 손에 맡기는 게 마음 편하다. 팀원 중 한 명은 D 등급을 받아야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팀은 최하 등급은 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원하지 않는다. 팀원 누구 하나 수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후우, 한숨을 뱉는다. 고민의 시간이다. 팀원 한 명씩 점수를 부여한다. 최하점자가 어쩔 도리 없이 가려진다.
최하점 팀원은 올해 초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큰 업무 과실이 있었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업무 파악이나 숙달에 소홀했느냐. 물론 아니다. 성실하고 업무 완성도도 좋았다. 기존 팀원보다 업무 상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유독 이번 하반기에 선임 팀원들이 빠짐없이 우수했다. 경력 입사 팀원이 열에 열을 채웠다면 다른 팀원들이 열하나, 열둘을 해냈다. 그들 중에 최하점자가 나오는 것도 온당치 않다. 최하점 팀원은 더 큰 임무를 부여받지 못했다. 아직 시간이 여물지 않은 탓이다. 기회가 적은데 과실이 클 수 없다. 이러저러한 사정을 모두 고려해서 얻은 결론이 그랬다. 차선책을 찾는다. 평가 조정 기간에 본부장에게 최하점 팀원을 D에서 C 등급으로 올려달라고 요청하기로 한다. 우리 팀원 중에 아무도 D 등급이 없길 바란다.
팀원과 면담하는 것도 평가 제도의 필수 사항이다. 최하점 팀원을 회의실로 부른다. 우리 회사 평가 제도의 취지, 설계, 방법론을 간단히 설명한다. 곤란한 얘기일수록 뜸 들이지 않는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너의 평가 점수가 상대적으로 가장 낮다. 네가 못한 게 아니라 다른 팀원들이 워낙 잘한 탓이다. 이대로라면 중간에 못 미치는 등급이 부여될 것이다. 하나 팀장인 내가 본부장에게 널 구제해 달라고 말씀드릴 거다. 문제는 그런 수혜를 입는 인원수도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네가 간택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까지 미리 알려주는 팀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너무 마음에 담지 말아라, 얘기해줬다. 팀원은 차분하게 알아들었다고 답했다.
솔직히 본부장이 내 청을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그가 일전에 그런 말을 했다. 어쩌다 평가 조정 얘기가 나왔다. 본부장 당신은 E를 D 등급으로, D를 C 등급으로 올리는 것은 마뜩잖다, 차라리 B를 A 등급으로 올리는 것에 당신 손에 쥔 카드를 쓰겠다, 조직 차원에서 보면 중간에 그득한 자원 중에서 진짜로 우수한 인재를 가려내는 게 더 득이 많다고 말했다. 똘똘한 20 퍼센트가 나머지 80 퍼센트를 이끈다는 ‘파레토의 법칙’ 비슷한 이유다. 일견 타당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인간적이지 않다. 회사도 사람이 일하는 곳이다. 전권이 있다면 나는 제도적 한계가 만들어낸 선량한 피해자를 최대한 구제하는 방향으로 권한을 행사할 것이다.
하반기 인사 평가 결과가 나왔다. 내 것보다 최하점 팀원의 등급을 먼저 확인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가수 이승환, 오태호 형님들이 일찍이 노래하셨다. 본부장은 당신의 권한을 앞서 천명한 대로만 사용했다. 최하점 팀원은 D 등급을 받았다. 오늘 팀원은 나와 다른 공간에서 일한다. 팀원에게 긴 메시지를 보냈다. 좀체 하지 않던 짓이다.
- 나] OO야 결국 본부장이 평가등급 안 올려주셨구나.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못한 내 탓이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넌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고 한 번의 평가등급이 네 전체의 인생을 어쩌지 못한다. 티끌만큼의 영향도 없는 것이지. 그렇더라도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닐 테니 기분 풀고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수고해주길 바란다.
잠시 뒤에 응답이 온다.
- 팀원]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주신 것도 알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해 주시는 것도 느껴져서 많은 위로가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말씀처럼 티끌만큼의 영향도 없을 거고 팀장님께서 알아주시니 저도 훌훌 털고 다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함께 안타까워해주시고 진심으로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날 팀원에게 점심밥을 사줬다. 내 취향 말고 팀원의 식성을 배려했다. 평소보다 단가가 조금 센 메뉴를 권했다. 먹어, 먹어 괜찮아. 팀장과 먹는 식탁에 산해진미가 오른다고 한들 맛있겠냐만 그래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 그럼 됐다. 밥 먹는 내내 머릿속으로 회사 인사 제도의 불완전성, 불합리함을 곱씹었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상대 평가인가. 요즘 큰 회사들은 절대 평가로도 많이 한다던데. 아니 글로벌 기업 중에는 인사 평가 자체를 하지 않는 곳도 늘어나는 추세라던데. 인사부서에서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아니지, 어차피 그것도 일이라 굳이 안 하려나. 팀장님 식사 안 하시고 무슨 생각하세요? 팀원이 묻는다. 어, 어, 아니, 아냐, 밥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