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4박 5일 경남 고성, 남해 여행기

by Hoon

금년 마지막 세 식구 여행이다. 4박 5일 일정. 처음 두 밤은 캠핑장에서, 나중 두 밤은 펜션에서 보낸다. 일전에 포항 여행을 이런 식으로 구성했는데 좋았다. 앞으로도 사오일 가량 여가시간이 생기면 캠핑장과 호텔, 펜션을 두루 이용할 계획이다. 먼저 이삼일은 방문 지역의 풍광을 아웃도어로 즐긴다. 캠핑은 딱 그 정도가 좋다. 더 길어지면 훈련, 생존이 된다. 제아무리 캠핑장 시설이 잘 돼있대도 콘크리트 건물이 제공하는 ‘프라이빗’한 그것에 비할 바 아니다. 호텔이나 펜션으로 이동해서 야영의 피로를 푼다. 그때부터 명승고적이나 관광지, 위락시설을 본격적으로 방문한다.


아내는 가능한 수도권에서 멀리 떠나고 싶어 했다. 나는 경상남도 남해를 좋아한다. 오빠 오랜만에 남해 갈래? 응, 좋지. 그렇게 결정됐다. 남해 캠핑장을 검색했는데 마뜩한 데가 없었다. 아내는 나보다 지리에 밝다. 실은 나는 길치다.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에 지도가 입력되지 않는다. 아내 말로는 고성이 멀지 않단다. 고성? 서핑의 성지? 하고 반응했더니 그럴 줄 알았단다. 강원도 고성 말고 경남 고성이 따로 있단다. 전라도 광주 아니고 경기도 광주 같은 거구나. 아내가 고성 군내에 바다와 면한 캠핑장을 예약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SUV 승용차에 캠핑 장비를 싣는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에 캠핑장 이름을 입력한다. 소요시간 4시간 반. 휴게소 한두 번 들르면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내 낡은 자동차가 오랜만에 또 장거리를 뛴다.

캠핑장 전경

다행히 고속도로가 뻥뻥 뚫렸다. 예상한 시간에 알맞게 도착했다. 그래도 텐트 설치를 서둘러야 한다. 벌써 그림자가 길다. 곧 있으면 해가 넘어간다. 바닷가 캠핑장이라더니 완만한 모래사장 인근인 곳이 아니다. 해안가 절벽 한 면을 다듬어서 캠핑장으로 조성했다. 그것대로 절경이다. 바닷바람이 매섭다.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발효 중이다. 너무 추워서 사고마저 얼어붙는다. 여러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얼른 텐트 완성하고 들어가 쉬자.


땅이 꽝꽝 얼었다. 짧은 이십 센티미터 길이 팩을 가져왔는데도 잘 박히지 않는다. 팩 망치를 들고 씨름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캠핑장에 석양이 눕는다. 저녁 지어먹자. 오늘 저녁 메뉴는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다. 두툼한 고기를 집에서 미리 수비드 조리법으로 초벌로 익혀 왔다. 팬에 버터를 넉넉하게 썰어 넣고 예열한다. 버터가 끓을 때쯤 고기를 얹는다. 취, 먹음직스러운 소리에 군침이 돈다. 로즈메리 허브도 챙겼다. 구색을 갖추면 캠핑장 스테이크도 전문 레스토랑 부럽지 않다. 만 원짜리 와인 뚜껑을 일찌감치 따 둔다. 꿀렁꿀렁 캠핑용 플라스틱 와인 잔에 따른다. 기분 좋게 짠. 운전하느라 고생했네. 여행 계획하느라 애썼네. 오늘은 잘 먹고 마시고 자면 일정 끝. 자기 전에 빔 프로젝터 연결해서 영화도 한 편. 엊그제 스트리밍 서비스에 배우 공유랑 배두나 나오는 공상과학 드라마 올라왔다는데. 장작 불멍은 너무 추우니까 생략.

바람 센 날엔 가이라인 필수

밤새 한숨도 못 잤다. 바람이 세서 텐트가 통째 날아가는 줄 알았다. 아내와 아이는 새근새근 잘만 잔다. 가장의 역할이 이런 거겠지. 불침번은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아침은 가정식으로 준비한다. 말이 거창하지 밥, 국, 반찬 조합이다. 그마저도 모두 대기업 제품이다. 전자레인지와 가스버너로 가열하는 게 조리 과정의 전부다. 아침밥을 먹고 도로 누우려는데 텐트 천정이 더 심하게 요동친다. 필요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누웠다 다시 일어난다. 바람 많이 불면 평소보다 촘촘하게 또 꼼꼼하게 텐트 하단부와 땅바닥을 팩다운 하기만 하면 되는 걸로 알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텐트가 지면에 딱 붙었다고 해도 바람에 본체가 휘청거린다. 집으로 치면 벽이 바닥면에 붙어있긴 한데 앞뒤 옆으로 흔들리는 상태다. 그럴 때 쓰는 게 ‘가이라인(Guyline)’이다. 텐트 허리 높이에 보면 끈으로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달렸다. 거기에 끈을 걸어서 지면과 45도 각도가 되게 팩다운 한다. 마침 스트링(줄)도 있고 팩도 여유분이 있다. 바람을 뚫고 밖으로 나가 가이라인을 좌우 각 세 개씩 연결한다. 그랬더니 한결 낫다. 어지간한 강풍에도 텐트 전체가 뒤뚱거리지 않는다. 캠핑족의 한 사람으로 오늘 하나 또 배웠다. 바람 부는 날에는 가이라인을 반드시 설치하자.


육체노동을 했더니 뱃속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아내가 봐 둔 지역 맛집이 있다. 해산물 짬뽕이 대표 메뉴인 중식당을 찾아간다. 짬뽕은 초등생 아이도 무척 좋아한다. 캠핑장에서 차로 달려 식당 앞에 주차한다. 오늘 점심은 많이 늦었다. 오후 1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식당에 바로 입장하지 못했다. 우리가 대기 손님 1번. 웨이팅이라니. 맛집의 단서다. 조금 기다렸다 입장. 짬뽕 둘에 탕수육 작은 거 하나. 기다림은 지금부터다.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니 젓가락만 빨고 있는 손님들이 수두룩하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하고 있는데 벽에 붙은 액자가 시선을 끈다. ‘저희 중국집은 고객님들께 최고의 맛을 선보이기 위해 주문을 받는 즉시 사장인 동시에 한 명뿐인 요리사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있으며..’ 끝까지 다 읽을 필요도 없다. 맛있는 거 먹으려면 잠자코 기다리란 소리다. 자그마치 사십여 분을 더 기다려서 우리 테이블에도 짬뽕과 탕수육이 올라왔다. 이 정도 기다려서 먹으면 맹물에 밥만 말아먹어도 맛있지 않을까. 맛있어서 기다리는 걸까, 기다리니까 맛이 있는 걸까. 짬뽕 그릇 위에 홍합, 갑오징어, 새우, 가리비, 바지락이 수북하다. 국물부터 한술 뜬다. 시뻘건 빛깔과 다르게 많이 맵지 않다. 불맛 좋고 시원하다. 탕수육도 맛본다. 튀김옷에 찹쌀가루를 썼는데 생소한 향신료도 섞였다. 소스는 케첩 없이 간장 베이스다. 딱딱하지는 않고 크리스피하게 와사삭 부서진다. 맛있다. 기다렸기 때문에 맛있는 게 아니라 확실히 맛이 있다. 맛이 나니까 기다릴 만하다.

해물 듬뿍 짬뽕 & 찹쌀 탕수육

겨우 점심 먹었는데 햇볕이 불그스레하다. 본래 계획대로 라면 점심을 늦지 않게 먹고 ‘고성 공룡 엑스포’를 찾았어야 한다. 지금 가면 너무 늦다. 입장료 사서 들어가자마자 사진 몇 장 찍고 돌아 나올 것이 빤하다. 캠핑장으로 돌아가자. 아이가 크게 낙담한 눈치다. 입이 삐죽 나왔다. 내일 남해 가면 더 재밌게 놀게 해 줄게. 아쉽지만 공룡은 다음에 만나기로. 고성 재방문에도 명분이 필요한 법. 금방 밥 먹고 나왔는데 차에 오르며 아내가 묻는다. 이따 저녁은 뭐 먹어? 아, 먹는 것도 성가시다. 배가 부르니 아이디어가 샘솟지 않는다. 이래서 백화점이나 마트 갈 때 밥 먹고 가라고 하나보다. 우리 저녁은 대강 즉석 덮밥 같은 거 캠핑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자. 왜 있잖아, 짜장 카레 이런 거. 아내도 흔쾌히 그러기로. 어쩌다 한 번인데 애 이런 거 먹여도 괜찮겠지? 아이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끼리 답을 구한다. 괜찮습니다.


텐트로 돌아와 두 번째 밤을 보낸다. 이렇다 하게 한 것도 없는데 이튿날이 다 지났다. 어제 보다가 만 공상과학 드라마를 마저 본다. 밥은 됐고 남은 술이나. 여남은 와인에 특별 안주를 곁들인다. 아내가 멜론을 한입 크기로 보기 좋게 썰어낸다. 그 위에 작심하고 마트서 사온 프로슈토(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말린 뒤 얇게 저민 햄)를 올린다. 건망고와 견과류가 들어있는 동그란 치즈도 피자처럼 조각내어 접시에 담는다. 술 파는 영화관이라. 내가 선호하는 최고의 조합이다. 시네필이자 애주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마침 옆 자리 텐트도 낮에 외출한 사이 철수하고 없다. 소음 신경 안 쓰고 편안하게 영화, 아니 드라마 감상.


어제도 드라마를 끝까지 못 봤다. 같은 플랫폼에 오징어 놀이가 나오거나 지옥도가 펼쳐지는 드라마는 하루 만에 정주행을 마쳤다. 내 체력이나 작품의 완성도 둘 중 하나는 문제가 있다는 거다. 잠은 중간에 깨지 않고 잘 잤다. 가이라인 덕분이다. 이제부터 바람 불면 무조건 그것부터 설치하기로 한다. 아침은 컵라면으로 때운다. 아이한테 자꾸 이런 거 먹여도 되나 싶지만 실은 애가 가장 좋아하는 식단이다. 산해진미도 라면 앞에서는 아이에게 설득력을 잃는다. 오늘은 남해로 이동한다. 대강 요기하고 캠핑 철수를 서두른다. 해체는 조립의 역순. 이런 것 자체를 즐기지 못하면 캠핑은 포기해야 한다. 부창부수는 캠핑장에서 참 맞춤한 낱말이다. 아내도 나도 이제는 너 저거 해, 나 이거 해 말이 필요 없는 경지다. 척척 접고 닫고 수납해서 차에 싣는다. 집에서 출발할 때보다는 조금은 가벼워진 차에 시동을 건다.

수영장 옆 햄버거 가게

고성에서 남해까지는 차로 한 시간 반 거리다. 다섯 시간도 달려왔는데 이쯤이야 껌이지. 도착하면 점심때다. 펜션 들어가는 길에 수제 햄버거 가게에 들른다. 식당 이름이 독특하다. 아내에게 재차 물었다. 가게 이름이 뭐라고? 아내가 답답한 듯 말한다. 더 풀이라고! 뭔 이름이 그러냐. 시키는 대로 내비게이션을 눌렀는데 바로 검색이 된다. 가게에 도착한다. 와, 이런 곳에서 이런 음식을 팔아도 장사가 되는구나. 아, 남해군 무시하는 소리가 아니다. 기대 이상으로 ‘힙’하기 때문이다. 서울 연남동이나 요새 ‘핫’하다는 성수동에 있을 법한 외관이다. 아내와 딸아이는 배 고픈 것도 잊고 사진부터 박는다. 메뉴는 단출하다. 햄버거에 감자튀김, 탄산음료와 맥주뿐이다. 이런 데가 진짜 맛집이다. 50년 된 곰탕집은 곰탕 말고는 안 판다. 최첨단 키요스크로 주문을 넣고 식당 안팎을 다시 둘러본다. 그제야 이해가 엄습한다. 여기 이름이 그래서 더 풀(The pool)이구나. 쓰지 않는 야외 수영장 한쪽 건물을 이용해서 식당을 차렸다. 작명도 감각적이기까지. 우리 뒤로 금세 대기 줄이 길어졌다. 진동벨이 울리고 음식을 받아온다. 입을 바다 밑 아귀처럼 크게 벌려서 한 입. 맛있다. 유명한 것치고 맛은 별로였던 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보다 이십 배는 맛 난다. 특제 소스가 우선 맛있다. 피클 잘게 갈아서 넣은 것이 신의 한 수다. 보통 미국식 핫도그에서 흔한 레시피인데 훌륭하게 차용했다. 소고기 패티도 수준급이다. 퍽퍽할 정도로 건조하지도 또 너무 육즙이 흘러서 ‘번(빵)’을 흥건히 적시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촉촉하고 풍미도 좋다. 고기 자체를 좋은 걸 썼다.


점심 먹고 펜션으로 이동. 남해군에 유명한 관광지 ‘다랭이마을’ 조금 못 가서 ‘빛담촌’이라는 펜션 부락이 있다. 아내가 그중 한 군데를 예약했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주인장이 불편한 기색 없이 환대한다. 문을 열었는데 한눈에 쏙 마음에 든다. 채광이 좋고 층고가 높다. 오션뷰는 말할 것도 없다. 이래서 내가 남해를 좋아하지. 괜히 한국의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동해와 서해의 해수욕장 앞과는 사뭇 다르다. 이곳 남해는 훨씬 평화롭고 유유자적하다. 저기 멀리 바다로 완만한 듯 제법 가파른 경사면이 멀리 내뻗는다. 굽이굽이 작은 오솔길, 경운기 하나 겨우 다니는 포장도로, 차량 통행을 위해 큰맘 먹고 닦은 찻길을 켜켜이 쌓은 저기 뒤로 한없이 잔잔한 남해가 하늘을 품는다. 한국의 산토리니가 아니라 그리스의 남해로 고쳐 부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자연산 모듬회와 해산물 곁들임안주

바다로 왔는데 해산물을 먹어야지. 저녁으로 회를 포장해서 오기로 했다. 혹시나 싶어서 배달 앱을 켰다. 역시나 ‘텅’. 배달이 가능한 식당이 없습니다. 여기가 땅끝, 남해이긴 하구나. 뭐든 직접 사러 가야 한다. 펜션에서 가장 가까운 횟집도 차로 이십 분 거리다. 게다가 하나같이 비싸다. 관광 비즈니스가 고도로 발달된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횟집은 고가다. 토박이 손님들만 상대하기에는 여의치 않을 것 같다. 뜨내기 관광객만 받아서도 장사 유지가 어려울 성싶다. 대안이 없다. 그나마 후기가 괜찮은 곳을 골라낸다. 해물 부속 안주와 매운탕을 포함해서 포장해준다. 모둠회 소(小)자가 양식은 8만 원, 자연산은 10만 원을 받는다. 아내 눈치를 보는데 의외로 자연산으로 주문하잔다. 그렇지, 마트에서 이삼만 원이면 먹는 양식 광어, 우럭 시키느니 큰 차이 아니면 자연산으로 가야지. 주인장께 자연산이면 어떤 생선이냐고 물었다. 농어, 도다리, 참돔을 섞어준단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른다. 편의점은 전국 어딜 가도 참 많다. 남해도 예외가 아니다. 지역에 가면 그 고장 소주를 마셔야지. 경남 하면 ‘좋은데이’. 두어 병 사서 회 포장한 비닐봉지에 끼워 넣는다.


펜션으로 돌아온다. 배고프다. 재빠르게 한 상 차린다. 뭐부터 맛볼까. 결들임 안주로 싸준 고둥, 생굴, 해삼, 전복도 모두 신선하다. 산낙지는 따로 계산을 치르고 샀다. 아이가 좋아한다. 아내가 뭐가 어떤 생선이냐고 묻는다. 그럼 난 이거, 하면서 도다리를 한 점 든다. 에이, 그렇게 먹으면 맛없지. 두어 점 넉넉하게 쌈 싸 먹어야 맛있지. 난 농어. 여름 생선인 줄 알았는데 지금 먹어도 그 맛이 나려나. 맛있다! 이래서 자연산 자연산 하나 보다. 비린내가 전혀 없이 담백하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올라온다. 게다가 이 집 초장 전문이네. 주인장 황금비율로 직접 만든 초고추장이 너무나 맛있다. 톡 쏘며 자극적이지 않고 은근하게 들큼하다. 회는 모름지기 막장이지. 상추도 크기는 좀 작지만 텃밭에서 직접 키운 게 분명하다. 상추 두 장에 깻잎 한 장, 생선 세 종류를 한 점씩 넣어서 초장, 쌈장 조금씩 올리고 마늘과 풋고추 토핑. 안주 일발 장전해놓고 아내와 좋은데이 한 잔 짠. 사는 게 별건가. 어쩌다 가끔 이러려고 사는 거지. 아이도 제법 맛있게 먹는다. 진정한 조기 교육은 외국말이 아니라 식도락에 절실하다. 채소와 양념까지 챙겨준 매운탕으로 마무리. 취기가 기분 좋게 올라온다. 이틀째에도 끝내지 못한 공상과학 드라마를 이어서 본다. 오늘도 다 못 본다면 이 작품은 분명 문제가 있는 거다.

기대 이상이었던 펜션 조식

드라마는 문제작임에 틀림이 없다. 끝내 마지막 편을 보지 못하고 잠들었다. 덕분에 잠은 푹 잘 잤다. 펜션에서 조식을 제공한다. 편리한 세상이다. 숙박업 업주들에게는 혹독한 경쟁이다. 아홉 시 딱 되니까 노크를 걸어온다. 룸서비스가 따로 없다. 드립 커피 두 잔에 오렌지주스 한 잔, 크로플 두 개에 크루아상 하나,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유리그릇에 담겼다. 큰 기대가 없었는데 기대 이상이다. 크로플을 맛봤는데 맛있다. 아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빵 위에 아이스크림을 발라 먹는다. 자기 주도 학습의 힘이다. 펜션에서 주는 서양 조식이 이 정도 수준이구나. 괜찮네 괜찮아.


어제까지 춥더니 날이 조금 풀렸다. 경남 방문 나흘째인데 달리 다닌 데가 없다. 아이도 심심하다고 뾰로통해지려는 참이다. 아내가 미리 일정을 짜두었다. 우리는 양 떼 목장으로 간다. 그냥 목장이 아니라 양몰이 ‘학교’라는 명칭이 붙었다. 아내에게 웬 학교냐고 물었다. 목장이면서 양몰이 개들을 훈련시키는 기능도 하고 있어서 그런 이름을 달았단다. 오, 그럼 훈련 장면도 볼 수 있는 건가. 펜션에서 일찌감치 나와서 출발. 한데 점심 끼니때가 어중간하다. 목장 가는 길에 이른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우리 뭐 먹어? 아내가 메뉴도 미리 결정해두었다. 내비게이션에 식당 이름 입력하고 다시 출발.

멸치 쌈밥 & 숭어회 무침

내비게이션이 남해 노량대교 밑으로 세 식구를 이끌었다. 식당 바깥에 설치한 커다란 수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겨울 제철 생선인 숭어 떼 수십 마리가 한 방향으로 나란히 헤엄친다. 은빛 비늘에 아침 햇살이 부서진다. 물도 물고기도 모두 깨끗하고 신선하다.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겠다. 그래서 오늘 아침 식단이 무엇이냐. 멸치 쌈밥과 숭어회 무침. 테이블을 잡고 잠시 기다리려니 보글보글 뚝배기와 소복이 음식 담은 접시들이 오른다. 뚝배기에 든 것이 멸치쌈밥. 멸치 하나를 집어 아이에게 보여준다. “우와, 이게 멸치야, 아빠? 이렇게 큰 것도 있어?” 아이 말마따나 어른 엄지나 검지 손가락 굵기다. 먹기에 좋게 머리와 내장은 일일이 떼어냈다. 비주얼 면에서도 그게 낫다. 상추쌈 위에 조그맣게 밥 한 술, 멸치 두어 마리, 쌈장, 마늘을 올린다. 아, 마늘은 다시 내린다. 큼지막한 만두 크기로 말아서 아이 입으로 가져간다. “어때 맛있어?” “음, 맛있네. 멸치에서 꽁치 맛이 나, 아빠!” 다 컸다. 멸치 쌈밥도 먹을 줄 알고, 꽁치 맛도 모르지 않다. 나도 한 쌈 싸서 먹는다. 마른안주나 반찬으로 취급받는 멸치 살을 이렇게 풍성하게 맛볼 수 있다니. 별미다. 회무침도 맛본다. 숭어회가 씹을수록 고소하다. 무침 양념에 막걸리를 썼나 보다. 더없이 향긋하고 새콤달콤하다. 술 들어간 거니까 아이는 먹이지 않는다. 막걸리 냄새 맡으니까 오전부터 술 당기네. 겨우 참는다. 이렇게 먹고 인당 만 오천 원. 어른 몫만 시켰으니까 삼만 원. 제법 가성비도 좋다. 훌륭한 한 끼였다.


목장으로 향한다. 식당에서 이십 분 거리. 금방이다. 아내가 모바일로 입장권을 미리 구매해 두었다. 어른 사천 원, 아이 이천 원. 관광 명소 입장료 치고 아주 비싼 가격은 아니다. 요즘은 궁이나 능, 국립공원, 박물관만 들어가려고 해도 인당 오천 원, 만 원이 우습다. 온전한 상태 유지와 보수를 위해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통나무로 지어 놓은 매표소를 통과하면 배추와 홍당무를 길쭉하게 썰어 담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려준다. 동물들 먹이 용도다. 양 떼 목장이지만 양 아니어도 다양한 동물이 함께 살고 있다. 작게는 토끼와 기니피그, 덩지가 있는 동물로는 돼지와 조랑말, 염소 축사도 있다. 그중 양과 염소, 조랑말은 울타리를 둘러놓은 산등성이에 방목한다.

양떼 목장에서

토끼 먹이를 주려는데 붙여놓은 팻말이 인상적이다. 당근은 조랑말이 좋아하고 토끼는 배추나 풀처럼 부드러운 먹이를 좋아한단다. 토끼에게 당근을 주면 소화를 못 시키고 배탈이 난단다. 오, 몰랐네. 말도 말이지만 토끼도 당근 좋아하지 않나? 어쩌다 그런 오해가 무의식에 탑재됐는지 잠시 골몰한다. 아, 어려서 티브이에서 본 만화영화. 구체적으로는 ‘벅스 바니’라고 부르는 서양 토끼가 주인공인 만화에서 그 녀석이 당근을 입에 달고 산다. 사람들 인식에 잘못된 상식이 자리를 잡은 거다. 그 만화 때문에 너무 많은 토끼가 유명을 달리하지는 않았기를 바라여 본다.


아이가 기니피그 케이지 앞에서 울상이다.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수십 마리 무리 중에 유독 체구가 작은 녀석이 있는데 도통 먹이를 받아먹지 못한다. 그뿐이 아니라 덩지 큰 개체들이 공연히 깨물고 등에 올라타 밟는다. 못 살게 군다. 가장 큰 두 마리가 주동자다. 저들끼리도 서열이 있다면 아마 넘버원, 투쯤 될 것이다. 피해자 기니피그는 물리적 공격 탓인지 심리적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인지 등에 털도 듬성듬성 빠졌다. 저대로 두면 오래 못 살지 싶다. 내가 배추를 흔들어 다른 무리들을 유인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가 구석에 웅크린 왕따 기니피그 코앞에 배추를 들이민다. 작은 입을 벌려 톡 튀어나온 앞니로 겨우 갉아먹으려는 찰나 넘버원이 어느새 달려와서 낚아챈다. 넘버투도 합세해서 왕따 기니피그 옆구리를 깨문다. 다른 쪽에도 먹이가 있는 걸 알아챈 나머지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감히 넘버원이 입에 물고 있는 배추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작은 인간 세상을 본 것 같아서 씁쓸하다. 선진 사회라면 저래서는 안 되지. 힘없고 약한 개체를 보호하고 살펴야지. 인간이 금수와 다를 수 있는 점은 바로 측은지심에 있음을 새삼 곱씹는다. 기니피그 케이지 앞에서.


양들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먹이를 줘도 된다. 목장 직원 아저씨가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먹이 바구니는 어른이 높이 들어주세요. 안 그러면 양들이 와서 아이들한테 빼앗아 갑니다. 진짜로 그렇다. 어른이 들고 있어도 축축한 코를 들이밀면서 배추 내놓으라고 성화다. 송아지만 한 양 떼들에 둘러싸이면 처음에는 겁을 먹을 만하다. 만날 먹는 걸 텐데 아삭아삭 맛있게도 먹는다. 한쪽에서 먹이를 주고 있으면 저기 멀리 반대편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양 떼 무리들이 느릿느릿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양 떼 이렇게 많이 길러서 어디에 쓰는 걸까. 아마도 털을 깎아서 유통하지 않을까 싶다. 양고기 맛있지만 고기는 유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양몰이 개 훈련

그러다 올 것이 왔다. 양몰이 개 훈련 시간이다. 훈련사 아저씨가 보더콜리 견종으로 보이는 개 한 마리를 데려왔다. 양 대여섯 마리를 몰게 한다. 훈련사 명령어에 따라 개가 시계 방향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양 떼를 능숙하게 몬다. 어떤 명령에는 납작하게 엎드려 기다리고, 군인들 포복하듯 낮은 자세로 양 떼 무리 쪽으로 접근한다. 모든 상황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양 떼를 쏘아보는 걸 거두지 않는다. 고도의 집중력이 아닐 수 없다. 잔뜩 겁먹은 양 떼가 양몰이 개의 의도대로 움직여 목표 지점인 기둥 사이에 안착한다. 그동안 없던 명령어에 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훈련사에게 달려간다. 훈련사 아저씨가 개 목덜미를 호쾌한 동작으로 흔들면서 보듬는다. 잘했어! 굿보이! 일요일 아침에 티브이로 보던 동물 프로그램을 현장 생방송으로 목격했다. 멋있다!


코스를 다 돌고 왔더니 트랙터에 연결한 깡통 기차가 운행 중이다. 어린이 손님 전용이다. 아이도 얼른 달려가서 한 칸 차지한다. 목장에서 일하는 할아버지가 열차 기관사를 맡으신다. 덜컹덜컹 들썩들썩 아이들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남해의 산등성이에 깨 뿌리듯 퍼져나간다. 천국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리라. 평화로움 그 자체다. 푸른 들판 위에 아이들과 동물들이 뒤섞여 뛰어논다. 여기 이곳에선 울타리 밖 세상의 모든 소란이 하찮다. 남해에 오면 양 떼 목장에 꼭 한 번 들르시길 권한다. 아내와 아이를 사진에 담고 차에 오르려는데 기관사 할아버지가 부른다. 아이 손에 김 모락모락 오르는 군고구마를 쥐어주신다. 남해의 인심.

깡통 기차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농협에서 운영하는 마트에 들른다. 남해에는 대기업 마트가 없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은 무얼 먹느냐. 기본으로 돌아간다. 여행은 고기고 고기는 삼겹살이지. 펜션에서 돈 몇 만 원만 더 치르면 그릴에 숯불 붙여서 테라스로 갖다 준다. 그런데 오늘은 추워도 너무 춥다. 반도 남녘이 이 정도면 수도권을 오죽 추울까. 바비큐 말고 방 안에서 전기 그릴을 쓰기로 한다. 전기 그릴 없어도 걱정할 것 없다. 주인집에서 무료로 대여해준다. 고마울 따름이다. 아내가 삼겹살 만찬을 준비하는 사이 나는 테라스에 있는 야외 월풀에 온수를 채운다. 아이도 나도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뜨뜻한 물에 몸을 폭 담근다. 아이랑 물장난하며 노는 중에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 이제 나가서 밥 먹자. 고기 굽는 건 내 담당이다. 내가 잘 굽는다. 남이 하면 고기 버린다. 소맥 한 잔 말아서 털어 넣고 삼겹살 한 쌈. 삼겹살은 언제나 옳다. 아쉬운 밤이 깊어간다. 오늘 드디어 공상과학 드라마 마지막 회 감상이다. 문제라면 문제작. 기왕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한다. 공유, 배두나 배우님 수고 많았습니다.


복귀의 날이 밝았다. 다섯 시간 운전해서 또 가야 한다. 지체할 수 없다. 어제 먹었던 조식 룸서비스를 또 누린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받아 드는데 주인집 직원(사장님 어부인으로 추정)이 이것도요, 하면서 도톰한 비닐봉지를 내민다. 올라가는 길에 아이 간식으로 주란다. 초콜릿이며 사탕, 캐러멜과 과자를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아휴 뭘 이런 것까지, 고맙습니다! 재방문 의사에 쐐기를 박는다. 언제고 남해에 다시 오면 기어코 여기 펜션으로 다시 오리라.

남해 빛담촌 펜션 마을

세밑, 한 해의 끝 무렵을 채우기에 더없이 좋은 여행이었다. 네 밤 다섯 날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즐거웠고 맛있었고 춥지만 따뜻했다. 감염병 시국을 두 해 째 관통하는 일 년이었다. 마스크 없이 여행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그런 세상이 있기는 했었나 싶다. 밝아오는 새해는 평안한 일상이 조금씩 우리에게 돌아오는 날들이길 마음 깊이 염원한다. 경상남도 고성과 남해, 마음 따뜻한 그 고장 주민들에게도 올해보다 더 따스한 햇살이 드리우길 바란다.




펜션에서


# 남해 놀터캠핑장

# 통영짬뽕

# 더 풀

# 힐링뷰 펜션

# 어화도 횟집

# 곰바우 횟집

# 양모리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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