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의미

by Hoon

통화를 마친 딸아이가 힝, 하고 입을 삐죽 내민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만나서 놀자고 약속을 잡았는데 친구가 십분 전에 시간을 미뤘단다. 자기는 늦을까봐 일찍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옷까지 다 입었는데 지금 전화가 왔단다. 아이 엄마가 거든다. 아니, 걔는 뭐 그러냐, 미리 물어보든가 직전에 미루는 게 어디 있느냐 말을 보탠다. 엄마 말을 들은 아이 얼굴이 더 실룩거린다.


아내가 일장연설을 시작한다. 아이에게, 너를 일방적으로 기다리게 하는 친구라면 앞으로 계속 친하게 지내도 될지 생각해봐야 한다. 어쩌다 한 번쯤이야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그러는 거면 안 된다. 네가 자꾸 속상해하면서 억지로 친구한테 맞출 필요 없다. 지금이야 친구가 최고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나중에 어른 되면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될 거다, 예언까지 덧붙인다. 아이는 알쏭달쏭한 표정이다.


‘이불 킥’이라고 하던가. 어릴 적 이불 킥 했던 기억을 공개한다. 같은 반에 생일 앞둔 녀석이 있었다. 토요일 방과 후에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나도 부르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자리에 빠지면 요즘 애들 말로 ‘인싸’가 아님을 증명하는 꼴이다. 다른 잘 나가는 친구들과도 영영 멀어질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생일 맞은 아이에게 접근했다. 나도 좀 끼워주면 안 되겠느냐, 너 갖고 싶은 선물도 사가겠노라 했다. 녀석이 잠시 골몰한다. 시옷자 입 모양을 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정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도 이보다 더 굴욕적일 수 없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거 뭐 그렇게 목숨 걸 일이라고. 깨달음이 늦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재미없는 생일잔치도 처음이었다. 그날 모였던 아이들은 또래보다 성숙했고(정확히는 그런 척했고) 다소 불량스러웠다. 난 ‘범생이’에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 좋아하는 ‘오타쿠’였다. 녀석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내 친구들은 따로 있었다. 에이, 재미없어. 여기 끼려고 그렇게 애썼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 없었다.


‘먹고 대학생’ 시절에도 그랬다. 어젯밤 먹은 술이 깨지도 않았는데 오늘 다른 술자리에 기어코 나간다. 집에서 요양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오늘 빠지면 캠퍼스 아웃사이더로 전락할지 모른다. 난 당구장보다 만화방 파다. 백날 쳐대도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공강 시간, 당구장 가는 대열에 억지로 합류한다. 실력이 없으니 당구장 요금 내기도 숱하게 물린다. 거기까지면 다행이다. 대학가 당구장에서 당구만 치는 맹추는 없다. 친구들 짜장면, 짬뽕 값까지 싹 내가 낸다. 자기 주관이 없는 인간이다. 친구들 따라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다. 무리에서 탈락할까봐, 대세에서 멀어질까봐 전전긍긍한다.


요즘 말로 ‘현타’라고 하나. 이게 누구 좋자고 이러는 건지 갸웃했다. 내가 편하고 좋고 즐거워야 하는데 정작 내가 나를 소외시킨다. 친구들 의식하고 눈치 보고 취향에 맞추고 계획에 동조하고, 온통 타인이 중심인 우주다. 그 태양계에서 나는 변두리 외딴 소행성이다. 이렇게 살지 말자. 일단 내가 편하고 좋고 즐겁고 보자. 생각해보면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다. 공연한 불안감, 실체도 없는 소외감 때문에 스스로 벌인 일들이었다. 나를 찾자. 내 인생은 내 것, 우주의 중심은 나다. 난 그때부터 달라지기로 했다.


그래서 난 많이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내키지 않는 모임에 억지로 가지 않게 됐다. 어떤 친구와 왕래가 뜸해졌다고 해서 상심하는 일도 없다. 특히 나에 대한 존중, 최소한의 배려가 없는 지인이라면 관계의 단절도 피하지 않는다. 요새 유행하는 금융 용어로 ‘손절’까지도 감수한다. 아니, 그것은 손절이 아니라 ‘익절’이다. 내 인생의 리스크를 제거하는 일이므로 그게 더 이롭다. 이제는 인생의 무게 중심을 친구, 타인에게만 두지 않는다.


죽마고우가 있다. 중고등학교 동창이다. 장가들기 전까지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 그때는 대학교 하굣길에, 회사 퇴근길에 거의 매일 만났다. 그렇게 붙어 다녔으니 그 친구만큼 날 잘 아는 이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가족보다 가까웠다. 장가들고 나서부터, 그러니까 지금은 예전만큼 자주 보지 못한다. 전화 통화도 뜸해지더니 이제는 몇 달에 겨우 한 번 목소리 듣는다. 송년모임 비슷하게 연말에나 만난다. 그마저도 지난 연말엔 코로나 여파로 서로 안부 메시지만 주고받았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다. 만남의 빈도나 밀도가 관계의 깊이를 대변하지 못함을 안다. 친구와 나는 이제 그런 나이가 됐다.


딸아이에게 나도 한 마디 보탰다. “좋은 친구는 함부로 친구를 기다리게 하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시간 약속을 미루지도 않지. 친구가 곤란해할 걸 아니까. 친구가 속상해하면 나도 속상하니까. 친구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니까. 진짜 친구는 네가 보채지 않아도 먼저 찾아와. 그게 꼭 자주, 때 마다일 필요는 없어. 한참 만 이래도 언제고 반드시 널 보러 올 거야. 네가 보고 싶으니까. 네가 친구니까.” 아이는 알아듣는 건지 아닌지 심드렁하게 자기 핸드폰만 본다. 겸연쩍음은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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