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디자이너의 죽음

by Hoon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출근하는 전철 안에서 비보를 접했다. 어제 못 본 방송사 뉴스를 다시 본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 디자이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뉴스 앵커는 “스스로 생을 정리했다.”라고 표현했다. 그 말이 더 숙연하고 비통하게 다가왔다. 슬하에 남매를 둔 사내, 내 또래 가장이 어쩌다 그런 마음을 먹었을까.


사연은 이렇다. 사내는 촉망받는 자동차 디자이너였다. 평소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신차 출시를 앞둔 시점에는 집에도 올 수 없었다. 꼬박 사나흘을 회사에서 숙식하며 일했다. 끝내 정신과 치료를 받는 지경에 이른다. 6개월 휴직을 신청했다. 아내는 남편이 전에 없던 폭력적인 모습도 보였다고 인터뷰했다. 복직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사내는 기어코 삶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앵커는 이 죽음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죽음이라고 말했다. 곧 사회가 죽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살인이다. 동료들 얘기로는 무리한 업무 지시가 많았다고 한다. “오후 5시에 리뷰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 근데 야근은 하지 마라. 우리는 프로페셔널이니까.” 사내는 이런 말을 숱하게 들었다. 그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야근을 이어가던 어느 새벽, 사건이 터진다. 사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아무개입니다! 제가 부족한 게 많습니다! 잘하겠습니다!” 평소 건너편 동료에게도 작은 소리로 얘기하던 그다. 그런 사람이 한 행동이라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비극의 전조가 된 순간이다.


그런 상상을 하던 때가 있었다. 회사 다니는 게 죽기보다 싫을 때, 이대로 가다간 죽거나 미치거나 둘 중 하나가 돼버릴 것 같을 때. 그럴 때면 가본 적도 없는 먼 나라 ‘팔라우’를 떠올렸다. 다 때려치우고 거기 가서 고기나 잡지 뭐. 예전 여행 다큐멘터리에서 팔라우를 소개했다. 한국 교민이 나오는데 낮에는 고기 잡고 밤에는 민박을 운영하며 먹고 산다. 저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네. 아니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래, 만약에 일 하다가 죽을 만큼 힘들어지면 저기로 가자. 죽는 것보다야 낫잖아. 억울하게 내가 죽긴 왜 죽어. 기왕에 버릴 삶이라면 딴 데 가서 새로 시작해보지 뭐.


자동차 디자이너의 죽음 전에도 많았다. 초임 검사, 장수 고시생, 말단직 공무원, 드라마 조연출, 막내 방송작가, 줄을 이은 명문 공대생들까지. 많은 영혼들이 일터에서 떠안은 마음의 짐 때문에 삶을 줄기에서 끊어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쉬웠다. 솔직하게는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아니, 죽긴 왜 죽어? 죽을 용기로 살아야지. 그 일 아니면 할 게 없나? 좀 덜 벌어도 맘 편한 직업 찾으면 되잖아. 죽기 전에 지금껏 모은 돈 펑펑 써보기라도 해야지. 어디 좋은 데 여행이라도 가면 좋잖아. 다녀와서 새로 시작하면 되잖아. 억울해서라도 그냥 이대로는 못 죽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겪어보지 않고 맘 편히 하는 소리다. 고개를 숙여 사죄한다. 미로에 갇힌 쥐는 벽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그냥 막다른 길이 나타나면 거기가 끝이다. 지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내가 속한 세계의 전부다. 더는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멈춘다. 아무런 희망이 없구나, 시커먼 생각이 온통 사고를 채운다. 그들은 미로에 갇혔다. 누구나 그들처럼 될 수 있다. 나도 물론이다. 어떻게 했어야 할까. 손을 뻗쳐서 난딱 들어 올린다. 얄궂은 미로의 벽 밖으로 꺼내 준다. 여기 말고 다른 세상도 있구나.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더 있구나, 깨달았더라면 결과는 분명 달랐을 일이다. 오늘도 그들은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난딱 들어 올리는 도움의 손길, 그중 한 손은 가족이어야 한다. 가장 절실한 말은 ‘괜찮아’다. 그만둬도 괜찮아, 포기해도 괜찮아, 다시 시작해도 괜찮아, 너만 당신만 있어주면 우리는 모두 괜찮아. 그 말만 들었더라도 그들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오래전 나도 일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난 오빠가 한 달에 백오십만 원만 벌어다 주면 돼. 다른 일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어. 오빠 재능과 능력이면 뭘 해도 그 정도는 벌 수 있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괜찮아. 나도 돈 버는데 뭐가 문제겠어. 나 알뜰한 거 알잖아. 줄이고 아끼면 우리 세 식구 충분히 살 수 있어.” 그 얘기가 너무 큰 위로가 됐다. 그래, 까짓 거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다른 한 손은 사회 시스템이 맡아주어야 옳다. 직장 문화의 개선 같은 빤한 소리는 하고 싶지도 않다. 권한을 가진 곳에서 똑바로 감시하라. 제도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것이 제대로 운영되는지 수시로 들춰보라. 작은 조직이 문제지, 큰 데서 그러겠어, 하면 안 된다. 조직의 덩지와 관계없이 부조리와 불합리는 어떻게든 숨을 곳을 찾는다. 언제든 재기가 가능한 일자리 여건도 시급하다. 우리나라의 직업 현실은 마치 양쪽에 벼랑을 낀 겨우 한 뼘 폭의 외길 같다. 한 번 삐끗하면 깊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라, 선진국 대한민국은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


오래전 태국 방콕 짜오프라야 강의 지류에서 만난 부자(夫子)를 생각한다. 방콕은 샛강이 많아서 나룻배가 흔하게 강 허리를 오간다. 나룻배라고 했지만 바퀴 없는 버스에 가깝다. 아들 청년이 일일이 손님들에게서 동전을 거두면 늙은 아비는 배를 뒤로 몰아 큰 데로 나아간다. 빼닮은 이목구비가 딱 봐도 부자지간이다. 종일 몇십 번이나 빤한 이 물길을 다녔을까. 그날 하루가 웬 말이냐, 아비는 일평생 셀 수 없을 만큼, 아들도 벌써 몇 천 번은 그 길로 배를 몰았을 터였다. 신기한 것은 부자가 모두 즐거운 얼굴이었다는 점이다. ‘행복한 직업인’ 하면 나는 그 두 사람이 퍼뜩 떠오른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느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시쳇말로 ‘사람을 갈아 넣었다’고 한다. 어떤 프로젝트가 짧은 시간 안에 큰 성공을 거둘 때 쓰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인신을 분쇄해서 넣는다니. 해외에서 찍은 방송 영상이 있었다. 갓 태어난 수평아리가 컨베이어 벨트에 떠밀려 분쇄기 위로 우수수 떨어진다. 사료 먹여서 키워봤자 알도 못 낳으니까 도살 처리하는 것이다. 그게 더 싸게 먹히니까. 스너프 필름에 다름없다.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병아리를 사람으로 치환하면? 끔찍하다고 한 이유다.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인생을 갈아서 없애는 일이다. 이 땅에서 다시는, 어떤 일로든 사람을 갈아 넣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어느 자동차 디자이너가 갈아 넣은 삶, 그렇게 세상에 나온 자동차가 훌륭한 운송 수단이 될 리 만무하다. 다시 한번 고인의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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