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헌터의 연락이 반가운 이유

by Hoon

핸드폰에 ‘깨톡’ 메신저 알림이 뜬다. 글자가 빼곡하다. 친구나 지인이 보낸 건 아닐 것이다. 광고 문자겠거니. 메시지 창을 닫으려는 찰나 첫 줄이 확 눈에 들어온다. “(주)OOO에이치알[헤드헌터]에서 포지션 제안이 도착했습니다.” 헤드헌팅 회사에서 보냈다. 이직을 제안하는 메시지다. 맨 아래에 체크 박스 두 개가 딸려있다. ‘수락합니다’와 ‘거절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강 혹은 파랑 알약 같은 것인가. 전자를 누르면 헤드헌터는 더 자세한 정보를 보내올 것이다. 후자를 선택하면 그와 나의 인연은 일단 여기까지다.


기술의 발달은 헤드헌팅의 영역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전에는 이랬다. 오후 노곤한 때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평소 저장돼 있지 않는 번호도 곧잘 전화를 받는다. 직업 특성상 그래야 할 이유가 많다. 모르는 번호라고 걸렀다가 도리어 내가 성가셔지는 일이 많았다.

- 예, Hoon입니다.

- 여보세요, 서치펌(헤드헌터들은 자기 회사를 그렇게 부른다.) OOOO에서 전화드린 헤드헌터 아무개 부장입니다. 실례지만 Hoon님 맞으신지요?

- 네, 맞습니다. 말씀하십시오.

- 예, 다름이 아니오라 제안드릴 포지션(헤드헌터들은 ‘일자리’를 그렇게 부른다.)이 있는데 현재 이직 의사가 있으신지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첫 통화가 이루어진다. 마지막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자기소개서를 아우르는 경력 기술서를 헤드헌터에게 보낸다. 헤드헌터가 받아서 구인 의뢰를 받은 회사로 보낸다.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면접 일정이 잡힌다. 한두 차례 면접을 통과하면 연봉을 협상한다. 내 입으로 돈 얘기 꺼내기가 껄끄럽다. 그때 헤드헌터가 나선다. 대신 입사 희망자의 시장가치를 거침없이 피력한다. 그것은 헤드헌터 스스로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연봉 규모와 연동해서 헤드헌터가 받아가는 수수료가 결정된다. 필연적인 공생의 관계다.


이직 의사가 없을 때도 딱 잘라 ‘노’라고 하지 않는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아직은 지금 회사를 더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나중에 저에게 더 적합한 자리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수고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잠재적 공생의 관계를 대비한다. 내 경우, 실제로 이렇게 통화를 끝냈을 때 다른 일로 전화를 주는 헤드헌터가 적지 않았다.


헤드헌터 입장에선 이직 의향이 있는지 묻는 것부터 에너지가 쓰인다. 방금 내가 받은 메시지는 그 수고를 크게 덜어낸다. 거절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덜 미안해 해도 된다. 다만,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아날로그적인 맛은 덜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를 뜻하는 ‘라포’. 그것의 형성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만 필요하지 않다. 예전 어느 통신회사의 광고처럼 진정한 기술은 사람을 향한다만, 편리한 만큼 사람 마음을 공허하게도 만든다.


그렇게 헤드헌터 전화를 받은 날은 내내 기분이 좋다. 탐나는 제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전에 없던 의욕이 샘솟는다. 쥐구멍보다 갑갑한 내 일상에도 드디어 볕 뜰 날 오는 것인가. 헤드헌터와의 첫 통화로 시작된 작은 균열이 인생에 어떤 지각 변동을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김칫국 제대로 드링킹 하는 거래도 아무 상관없다.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먼지 쌓인 경력 기술서를 업데이트한다. 자기소개서도 지금 나이에 맞는 내용으로 고쳐 쓴다. 언제까지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인자하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면접쯤에서 미끄러져도 정말로 상관없다. 다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된다. 적어도 직업인으로서 스스로를 중간 점검하는 귀중한 계기가 된다.


꼭 구미가 당기는 일자리가 아니어도 좋다. 아직은 내가 이 업계에서 쓸모가 있구나. 나를 찾는 데가 아주 없지는 않구나. 내가 꾸역꾸역 회사 다니면서 허송세월 한 건 아니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유쾌한 ‘자기 효능감’을 경험할 수 있다. 헤드헌터에게 거절하는 순간에도 내심 미소가 머금어진다.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까 헤드헌터에게 쌀쌀맞게 대할 이유가 없다. 전화 주셔서 감사하다, 도움이 못돼 미안하다, 저절로 친절한 말이 나간다. 헤드헌터의 전화는 언제나 기분 좋은 것. 그래서 이런 인식이 사고에 자리 잡았나 보다.


메시지 말미에 딸린 체크 박스를 누른다. 어느 것으로 눌렀느냐? 두구두구. ‘거절합니다’를 선택했습니다! 물론 도의적인 미안함을 담뿍 담아서. 물론 회사 생활이 대만족인 건 절대 아니다. 나라고 불만이 왜 없겠느냐만 마음이 시키지 않는다. 예전에 전화로 이직 제안을 받을 때와 지금의 나는 또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돈을 얼마나 더 줄 건지,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일을 시켜줄 것인지 따위가 선택의 준거였다. 이제는 더 복잡해졌다. 돈 많이 주면 일도 많이 시킬 거고, 하고 싶었던 일이라도 막상 해보면 또 아닐지 모르겠고, 일과 삶의 균형도 중요한 데다 싱글 라이프가 아니니 아내의 의사도 물어야겠고. 일자리를 옮기는 것은 더욱 요원하고 거창한 것이 되었다.


이 땅의 많은 헤드헌터들을 응원한다. 그들 덕분에 오늘도 매너리즘에 찌든 어떤 직장인이 뜻밖에 인정 욕구와 자기 효능감을 채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더욱 왕성하게 활동해 주시라. 여러분들이야 말로 대한민국 경제와 민생 활력의 주역입니다. 아울러 저 한 사람도 잊지 말고 이따금 연락 주시길.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라고 노래한 유행가처럼 거절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님을. 대한민국 헤드헌터님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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