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져도, 사라져도 좋은 자리

<부엉이와 보름달> 제인 욜런 글 / 존 쇤헤르 그림 / 시공주니어

by 플롯시

드디어 그날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춥지만 바람은 불지 않는,

달빛이 밝아 밤하늘까지 환한,

슬픈 노래 같은 기적 소리가 들리는 겨울밤.

아이는 아빠와 부엉이 구경을 하러 집을 나섰다.


<부엉이와 보름달>.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책이다. 영풍문고에서 쪼그려 앉아 처음 봤던 스무 살 무렵에도 좋았고, 리뷰를 쓰려고 7호선 끝자리에서 소심하게 반만 펴서 보고 있는 지금도 너무 좋다. 그렇지만 나는 삼십 대에 이 그림책을 가장 좋아했다. 가장 많이 봤다. 물론 아들들이 어릴 때라 읽어 주기도 했지만(정작 아이들은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혼자서 본 적이 많았다.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 빨아야 할 옷가지, 장난감과 먼지들. 며칠째 콜록이면서도 마스크 없이 나가려는 첫째를 돌려세우고, 아토피로 가려워하면서도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둘째와 실랑이를 했다. 패턴만 조금씩 바뀔 뿐 늘 비슷한 일, 비슷한 무게의 일상이 반복됐다. 내가 하는 일들이 너무 사소해서 지치는 날이 많았다. 이 사소한 것들에 내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내 체력과 시간과 삶을 다 써야 한다는 게 지치고 슬퍼지는 날, 그림책으로 숨어들었던 것 같다. 특히나 <부엉이와 보름달>을 여러 번 꺼내 읽었다.


그림책은, 현실이지만 희미한 이곳에서 가상이지만 본질인 저곳으로 가장 단시간에 뛰어넘을 수 있는 마법의 문이다. 그림책을 여는 순간 나는 이국의 눈 덮인 숲속에 서 있다. 내 앞에는 아이가, 그 앞에는 아이의 아빠가 걸어가고 있다. 나는 맨 뒤에서 그들을 따라간다.


숲은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다. 키 큰 나무들과 밤이 섞여 있는 자리는 어둡지만, 달빛과 눈이 만나는 지점은 눈부시게 환하다. 그 어둠 속에서 작은 야생동물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훔쳐보고 있다. 달빛이 밝고 하늘이 맑은 만큼 공기는 차갑다. 엄청 추웠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커먼 숲 그림자 속에서 뭔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앞의 아이도 이겨내는 중이었으니까.


코랑 볼은 얼어서 화끈거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엉이 구경을 나가면 조용히 해야 되거든요.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따뜻하게 해야 되거든요.


저 시커먼 나무 뒤에는 뭐가 숨어 있을까.

하지만 나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부엉이 구경을 나가서는 용감해야 하거든요.


아빠는 달빛이 고스란히 쏟아져내리는 빈터에서 부엉이를 불렀다. 부우우우우우엉-부우우우우우엉. 곧이어 대답이 들려왔다. 부우우우우우엉-부우우우우우엉. 그리고 침묵. 그때 머리 위로 소리 없는 그림자가 날아왔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그림자를 아빠가 손전등으로 비추었다.


일 분,

삼 분,

어쩌면 백 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부엉이와 우리는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다. 우리는 서로를 보았다. 나는 부엉이의 촘촘한 깃털을, 부드럽게 굴곡진 발톱을, 위엄에 찬 노란 눈을 바라보았다. 부엉이는 아마도 추레한 내 입성을, 물기가 남은 손을, 지친 눈을 보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자연 앞에 선 또 다른 자연물일 뿐이었다. 추위와, 달빛과, 눈과, 숲과, 부엉이, 그 냄새와 그 고요함 가운데 충만함을 느끼는 살아 있는 존재였다. 수백 개의 사소한 조각들이 쌓인 더미 속에서 머리를 털고 제 모습을 보이는 '나 자신'이었다.


이제 아이는 아빠 팔에 안겨 돌아간다. 행복하고 뿌듯하게, 부엉이를 만났으니 부엉이를 만나기 전보다는 자라서. 멀리 보이는 집 창문에 불이 켜져 있다. 나는 아이와 아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책장을 덮는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림책을 읽었으니 그림책을 읽기 전보다는 덜 사소해져서.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는 건 그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꿈꾸던 장소, 지니고 싶은 가치, 여전히 소망하는 것들, 간직하고 싶은 기억...


이십 대 중반에 나는 밴프라는 곳에 있었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로키산맥 줄기에서 뻗어 나온 웅장한 산들이 기절할 것처럼 멋지게 서 있는 곳이었다. 오래전, 달력 사진 아래 'Banff, Alberta, Canada'라는 글자만 보고 오래도록 꿈꾸던 장소였다. 그곳에 와 있다니, 나는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올 때마다 '정말 행복하다'라는 외침을 로키의 신선한 공기 속으로 날렸다.


어느 이른 아침, 물에 비취는 일출을 보기 위해 근처의 호수를 돌고 있는데, 트레일 옆 숲으로 시커먼 것들이 보였다. 아직 해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여명 속으로 보이는 거대한 뿔. 엘크 떼였다. 대여섯 마리의 엘크들이 앉거나 서 있었다. 몸집이 작은 새끼도 두 마리 정도 보였다. 크기와 자세는 달랐지만,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놀랐지만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발소리를 낮추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는 봤지만, 이렇게 숲에서, 갑자기, 가까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때는 두렵기보다는 경이로웠다.


나는 트레일에서도 그들로부터 먼 쪽으로 뒷걸음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무심하면서도 너그러운 눈.


너 같이 작은 애가 우리 세계에는 무슨 일이니.

좀 더 있을 거니?

그러든지 말든지.

우리는 어둠이 있는 동안 좀 더 쉴 거야.


몇몇은 눈길을 돌리고, 몇몇은 여전히 동요 없는 눈으로 이쪽을 건너보았다. 거대한 뿔의 가장자리가 어둠 속에서 희끗 빛났다. 잠시 그들의 방해자, 아니 방해자도 되지 못했던 나는 다시 숨죽여 뒷걸음쳤다. 엘크 떼와 조금 멀어지자 그제서야 살짝 겁이 나 종종걸음으로 트레일을 벗어났지만, 훨씬 큰 뿌듯함과 행복이 밀려왔다. 마치 부엉이를 보고 돌아가는 아이처럼.


자연은 신비롭다. 모래알 같은 일상의 부스러기 속에서 내가 작아지고 거의 없어지려 할 때, 나는 지치고 불안하고 불행해진다. 하지만 웅대하거나 세밀한 자연 앞에서 내가 작아지거나 거의 사라지는 것 같을 때, 나는 벅차고 충만하고 행복해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으며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작은 아이들을 키우던 서른 몇의 나는 그림책을 통해 스물 몇의 자연과 조우하고, 여전히 사소한 것들과 더불어 사는 마흔 몇의 나는 다시 그림책을 통해 서른 몇과 스물 몇의 나를, 그 때에도 저 때에도 사랑했던 자연을 떠올린다.


7호선이 청담대교를 건넌다. 드문드문 얼음으로 하얗던 한강도 녹고, 보이진 않지만 꼭 보이는 것 같은 봄의 기운이 아파트와 빌딩 위를 서성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푸른색 <부엉이와 보름달>을 한 손에 들고 여전히 추운 겨울밤 숲속에 머물러 있다. 어떤 판타지보다 더 신비로운 자연 속에, 부엉이와 보름달 아래 좀 더 서 있고 싶어 미적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