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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후 Jul 25. 2020

라오스에서 돌아본 여행의 의미

타인의 삶은 눈요기가 아니다

 다시 태국과 라오스 여행으로 돌아오겠다.

삼 월의 어느 날, 21시간 슬리핑 버스를 타고 태국에서 라오스로 이동했다. 나는 다리를 쭉 필 수 조차 없는 좁은 침대 좌석에 누웠다. 심하게 구불거리고 좁은 길을 달리며 '이대로 사고가 나도 그럴만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절망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 험한 길에서 오토바이 사고가 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행에서 고생의 순간들이 나는 마냥 불편하고 싫지만은 않다. 편하고 빠른 것만 추구하며 살던 나와 달리, 불편하고 느린 것이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환경일 수 있다. 그런 삶에 동화되다 보면 뭐가 좋고 싫은지에 대한 분간을 덜 하게 된다. 분간을 지우는 것은 팍팍한 나의 삶에 작은 틈을 내어준다.


 루앙프라방은 예상처럼 평화로웠고, 딱히 할 일이 없는 마을이었다. 그래서인가 태국과 라오스를 여행한 마을 중에 가장 나다운 곳이기도 했다. 나는 왜 지루한 마을들에 마음을 뺏기는가.



 내가 루앙프라방에 온 가장 큰 이유는 탁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탁발은 새벽부터 승려들이 음식을 공양받고, 공양받은 음식들을 필요한 이에게 다시 공양하는 나눔과 나눔의 불교문화다.

 나는 탁발을 보기 위해 새벽 다섯 시경 호스텔을 나섰다. 하지만 대문이 자물쇠로 꽁꽁 감겨 있어 나갈 도리가 없었다. 나는 집주인이 어느 호실에 묶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이런 이른 시간부터 그들을 깨울 염치도 없었다. 루앙프라방에 온 이유이기도 한 탁발을 못 보다니, 허무함이 몰려온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순 없었다. 까짓 껏 담을 넘어보지 뭐!

 내 키보다 1미터는 더 높은 나무 울타리 형태의 담을 보며 작은 한숨이 나왔지만, 발을 디뎠다. 요령이 없다 보니 팔이 긁히고 엉덩이가 찧이고, 신발은 담과 담 사이 틈에 끼여서 빠지지도 않았다. 누가 나타나서 오해라도 하면 어쩌나 심장은 벌렁댔다. 나는 허둥지둥 대다 결국 맨발로 착지했다. 내가 담을 넘었다니! 기쁨도 잠시 긁히고 찧인 고통이 몰려오고 나는 머쓱함에 웃음이 났다.



 이제 경건한 마음으로 탁발 행렬을 찾았다.

나는 탁발 행렬의 승려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었고, 내 옆에는 승려들에게 밥을 나눔 받는 한 아이가 앉았다. 탁발 행렬이 끝날 무렵, 나는 남은 밥을 모두 모아 그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중년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어린아이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이는 동물원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아이를 대놓고 쳐다보며 '불쌍하다, 어린 나이에 안쓰럽다'라는 말을 뱉었다. 몇몇은 플래시를 터트리며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아이는 이러한 상황이 익숙한 듯 태연하게 자신의 음식을 포대에 모아, 집으로 돌아갔다.


 이들의 삶이 관광객에겐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니. 가난이 눈요기가 되었고, 나눔은 관광 상품이 되었다. 타인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무례한 태도를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더 부끄럽고 화가 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참 동네를 걸으며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진을 찍고 불쌍하다 수군대던 그들과 달랐을까?

나 또한 탁발의 의미를 충분히 고민하고 이 행렬에 참여했던 걸까?
혹시 아이에겐 상처가 아닐 일에 제삼자에 불과한 내가 괜히 화를 내는 건가?


 탁발에 대한 궁금증으로 하루 꼬박 버스를 타고, 난생처음 담을 넘어 이곳에 왔다. 하지만 나도 탁발을 행하는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은 없었다. 우리나라에 없는 탁발이라는 문화가 그저 신기했던 것 같다. 나눔의 의미보다 생소함의 의미가 컸던 것이다. 대놓고 사진을 찍지 않았을 뿐, 이들의 삶은 사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며칠 이곳에 머물다 떠날 여행자에 불과하니까. 내가 한 탁발 역시, 나눔이 아닌 체험에 불과했다.

 나는 탁발이 끝나고 나서야 나눔의 의미를 돌아보았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승려들이 이른 새벽부터 타인을 위해 공양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여행의 의미가 무엇일까.

여행은 단순히 나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시간이 아니다. 여행자라는 일시성이 그들의 삶을 헤쳐선 안된다.


 나눔의 의미는 무엇일까.

탁발은 이방인에게 관광상품에 불과할까. 돈을 지불했다면, 이 정도의 무례함 쯤은 돈을 받는 그들이 견뎌야 할 몫인 건가. 가난은 이곳에선 부끄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말들은 순식간에 이들의 일상을 불쌍한 삶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의 몫을 누군가에게 선뜻 내놓은 적은 있는지, 누가 더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지, 반드시 돌아봐야 할 문제였다. 


나눔의 현장에서 이기심을 보았다.

나눔의 의미에서 무관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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