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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후 Feb 05. 2020

집 없는 여행자의 설움

빌어먹을 치앙마이의 첫인상

방콕에서 9시간 동안 야간 버스를 타고 치앙마이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이전 여행에서도 국경을 넘거나 장거리 이동에서 야간 버스를 자주 탔다 보니 '9시간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야간 버스는 다른 교통수단보다 저렴하고, 더불어 숙소 경비로 아낄 수 있다 보니 몸이 견뎌줄 때 실컷 타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만 야간 버스를 타면 아침 일찍 낯선 도시에 도착하기 때문에, 피곤한 몸을 쉬고 여행할 수 있는 early check-in 가능한 숙소를 예약하곤 한다.


새벽 5시 49분, 허리가 베기는 탓에 잠에서 깼다.

얼마쯤 왔나 싶어 버스 커튼을 걷었다.

밖은 여전히 검다.

가로등 하나 없는 검은 길을 홀로 달리고 있다.

건물 하나 걸치는 곳이 없다 보니 창 옆으론 별들이 수놓아져 있다.

고개를 애써 들지 않아도 북두칠성이 보이는 밤을 가진 나라.

나는 왜 이곳으로 떠나왔나.

 


한가로운 치앙마이의 농부악 공원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버스 터미널엔 툭툭 한 대 없다. (버스 애용자인 나는) 또다시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마침내 숙소에 도착했지만 빌어먹을.

분명 9시부터 체크인이 된다 하여 예약한 숙소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아저씨는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안된다고 한다. 나의 예상 도착시간과 체크인 시간을 확인하는 메일도 보냈는데 도착하니 말을 바꾼다. 내가 예약한 방에 어제 자고 있는 손님이 있다는 거다. 근데 성질은 왜 나한테 내는 건지. 다른 건 몰라도 씻는 건 마음은 간절했는데, 방법이 없다. 이런 막무가내의 상대에게 따질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기름진 머리를 질끈 묶고 밖으로 나왔다.


이래서 사람은 집이 있어야 돼!

다 필요 없고 한국에 있는 코딱지만 한 내 방에서 푹 자고 싶었다.

누구는 치앙마이가 살기 좋다던데, 시작부터 글러먹었다. 상할 대로 상한 기분으로 씩씩대며 동네를 걸어 다녔다. 5시간이 넘는 시간을 어디서 보내지 생각하다 숙소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농부악 공원으로 향했다.


진지한 표정조차 귀여운 아이들

우연히 한 초등학교 옆을 지나가는데 아침 행진하는 치앙마이의 아이들을 보았다. 귀여운 교복을 갖춰 입은 아이들이 나에겐 새로웠는데, 이들에겐 기름진 머리의 외국인인 내가 더 새로웠나 보다. 우리는 서로를 신기하게 쳐다보다 웃음이 터졌다. 사진을 찍어주겠다 하니 친구들끼리 모여 포즈를 취한다. 천진난만한 그들을 보며 조금 나아지는 기분을 느낀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찾아온 공원엔 사람 하나 없다. 나는 야간 버스에서 받은 인스턴트 버거를 꺼내 먹었다. 씻지도 못한 상태에서 햄버거를 먹는 내 몰골은 거지가 따로 없었다. 닭고기 패티 하나밖에 없는 싸구려 햄버거는 왜 이 상황에서조차 맛있고 난리인지. 이런 가벼운 입맛과 기분을 가진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실 났다.

저렴한 입맛의 소유자는 저렴한 행복에도 쉽게 긍정한다


점심 즈음 햇빛이 강해지자 카페에 들어갔다. 메뉴판 그림을 가리키며 타로 밀크티를 주문했다. 하지만 정작 나오는 건 (내가 정말 싫어하는) 블랙 밀크티. 역시 치앙마이는 끝까지 긴장을 놓으면 안 되지. 최대한 맛을 음미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음료를 마셨다. 음료는 별로였지만, 사람 없는 카페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은 끝내주게 좋았다.


그렇게 아침의 감정은 이미 잊힌 채로,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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