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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후 Aug 17. 2020

지도를 벗어나면 보이는 것들

가진 것을 소망하는 어리석음

 몽블랑을 떠나 파리로 넘어가기 전, 나는 한 마을을 더 머물렀다. 프랑스에 잠시 살았던 친구에게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 한 곳을 추천해달라 했다. 친구는 프랑스의 알프스 호수 마을, 안시를 추천했다. 반나절이면 안시를 여행하기에 충분하다고 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동의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모순적인 나는, 이곳에서 사흘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빠와 어린 아들이 사는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다. 내 방에는 발코니가 있어 마을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또한 부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해 먹었다.

 오후에는 안시의 랜드마크인 섬의 궁전으로 향했다. 사진 속 동화 같은 풍경과는 다르게 날파리가 끔찍이도 많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와 함께 날파리가 한 마리씩 코로 들어오는 것 느껴졌다. 예쁘게 가꿔진 건물 주위로 드글대는 날파리 떼를 보고 있자니 괴리감이 들었다. 올드타운을 거닐어도 안시는 전형적인 관광산업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내가 상상한 안시가 아니었다. 반나절만 머물라는 친구의 말을 들을 걸, 나는 빨리 이 마을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튿날이 밝고, 나는 올드타운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늘도 날파리 떼에서 밥을 먹을 순 없어, 나는 안시 기차역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저 멀리 알 수 없는 호수 너머로 향했다. 호수 건너편에는 어떤 모습이 있을까, 인터넷이 알려주지 않은 새로운 풍경을 스스로 찾아보기로 한다.



 마을을 둘러싼 산을 곁에 두고, 호수의 긴 둘레를 달렸다. 유럽은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춰졌을뿐더러, 보행자를 우선해주는 문화여서 자전거를 타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바람을 맞으며 호수 옆을 달리다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꽤 멀리 달리다 어느 순간 나는 멋진 풍경 앞에 서있었다. 정신없이 호객행위를 하는 올드타운과 달리 이 곳은 호수와 사람만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수영을 하고 나무다리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바지를 걷었다. 돌에 앉아 잔잔한 물결이 치는 호수에 발을 담갔다. 시원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졌다. 발장구를 치다가 빵을 조금 먹다가, 책을 읽었다. 풍경 좋은 곳 한가운데 앉아 여유로이 책을 읽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었다.

 널브러진 사람들 속에 내가 섞인다. 사람들은 유일한 동양인인 나를 신기한 듯 쳐다봤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처음 본 자연에도 이질감이 없었다. 지구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아서 일까, 이곳 또한 내가 사는 행성이라는 경이로움에 벅차오를 뿐이었다. 시각, 청각, 후각, 공간감이 주는 완벽한 행복이었다.  




 그 순간의 나는 미래에 어떤 일상을 살고 싶은지 상상했다.

"작아도 아늑한 내 집을 마련하고 싶어. 한쪽 벽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 채울 거야. 강아지도 함께 살고 싶어. 빔 프로젝터가 있어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고, 매트리스 말고 침대에서 자고 싶어. 방 한편엔 큰 세계지도를 붙이고 내가 가본 곳을 채워 갈 거야. 그리고 나의 여행 사진들을 붙여 놔야지.

 되도록이면 가족, 친구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싶어.  부담 없는 사랑과 우정을 쌓아가고 싶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세계로 나가서, 이 넓은 지구를 살아가는 수많은 삶을 직접 보고 경험해야지. 악기 하나쯤 연주하는 취미를 갖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을 꾸준히 할 거야. 집에서 건강한 요리도 해 먹으며 살고, 언어든 법학이든 철학이든 나를 위한 공부를 끊임없이 하고 싶기도 해."

 한참을 고민하며 적어간 이상적인 삶을 그려보니 깨달았다. 사실 이미 가졌거나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곳을 벗어나니 그곳이 내가 꿈꾼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노마드의 삶을 꿈꾸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서울이었다.

 

 여행 중에 성당에 들어가게 되면 기도를 한다. 그때마다 바라는 것을 돌아보면 결국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 각자의 꿈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이어질 수 있기를. 지금 나의 상황이 불만족스럽고 부족함을 느끼지만, 사실 나는 모두 가진 상태일지도 모른다. 내 미래의 소원은 모두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 가진 행복을 보지 못하고 미래에 행복하기만 바란다면 나는 언제쯤 소원에 만족할 수 있을까. 미래에 인생이 완벽할 것을 막연히 부러워하지 말고, 어쩌면 이미 완벽한 지금에 감사해야 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사랑을 충만히 느끼며 살고 싶었다.



 한 도시를 깊숙이 보면 인터넷으로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사람은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는 처럼 여행도 그렇다. 빠르게, 많이 보는 여행보다 천천히, 오래 보는 여행이 생각지도 못한 평화와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는 것에는 여행의 여운이 짧다.


 안시의 첫인상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지만, 오늘의 나는 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찾아 나선 길에서 내가 상상한 안시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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