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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후 Aug 02. 2020

넓고도 작은 세상 속, 작지만 전부인 나를 위해

몽블랑에서 패러 글라이딩을

한 달간의 스페인 생활을 마쳤다.

이제 나는 스위스의 제네바를 거쳐 프랑스 동쪽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로 다시 국경을 넘어 도착한 프랑스의 샤모니. 스위스의 자연을 느끼고 싶지만, 몹쓸 물가가 부담이 되는 여행자들에게 샤모니의 몽블랑은 매력적인 마을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지는 몽블랑의 만년설은 긴 여정으로 쌓인 묵은 피로감을 가시게 했다.


그곳에서 산다는 것과 그곳을 여행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산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없고 그날그날 하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면 여행하는 것은 한정된 시간 내에 알아볼 것도 해야 할 것도 늘어간다. 여유 넘치는 스페인에서의 한 달을 지내다가 오래간만에 여행자의 신분이 되어서인가, 몽블랑 패스권부터 날씨, 가야할 곳, 예약할 곳 등 알아볼게 많아졌다. 그새 귀찮음이 몰려온다.


흔하게 마주하는 샤모니의 풍경


패러 글라이딩을 예약하기 위해 숙소를 나왔지만, 때마침 비행시간이라 센터가 모두 닫혀있다. 나는 마트에서 산 바나나와 뱅오 쇼콜라, 인스턴트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평화로운 아침식사 후에 가장 높은 전망대가 있는 에귀 디 미디로 향했다. 이미 부지런한 여행객들로 인해 입장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이걸 언제 기다리나 고민하는 찰나, 혼자 온 여행객의 특권이 이런 때 빛을 발했다. 운이 좋게 뒷타임에 있는 딱 한자리의 공석 덕분에 나는 대기 없이 바로 케이블카에 오를 수 있었다. 3800m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전망대를 지었을 누군가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십만 원의 패스권은 전혀 비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정상에는 하얀 만년설 봉우리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런 자연에서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실 수 있다니, 숨쉬는 것만 들여다 보아도 반나절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드디어 패러 글라이딩을 하는 날이 밝았다. 다행히 날씨는 아주 맑다. 예약 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숙소의 마당에서 책을 읽었다. 샤모니 또한 물가가 싸지 않다 보니 1인이 묵을만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연히 큰 호텔에 있는 4인 여성 도미토리를 발견했다. 도미토리는 캐리어를 펼칠 공간도 없이 좁았지만, 호텔의 모든 투숙객이 이용하는 공용 공간이 많았다. 그중 설산의 풍경을 앞에 두고 캠핑의자를 펼쳐 쉴 수 있는 마당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마당에서 책을 읽고, 맥주를 마시고, 영화를 본 평범한 시간들이 몽블랑 앞에서라면 특별하게 느껴졌다.



패러 글라이딩 예약 시간이 됐다. 나의 비행을 도울 피터와 함께 에귀 디 미디를 올랐다. 산 중턱 눈 밭에 도착하니 긴장이 몰려왔다. 미끄러운 눈을 느릿느릿 걸으며 나는 절벽 앞에 섰다. 이곳이 어디인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피터는 내게 안전장치를 채웠다. 그리고 자신이 신호를 주면, 허공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리라고 내게 말했다. 걸어가라 해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졀벽을 향해 달리라는 거야!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피터는 내게 "Go"를 외쳤다.


이럴 때일수록 오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아. 나는 눈 한 번 질끈 감고 절벽을 향해 달렸다. 어느 순간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매섭게 몸을 스치는 바람만이 남아있다. 모든 감각은 발아래 펼쳐진 풍경들에 정신을 잃었다. 주위를 둘러싼 설산, 폐가 청소될만큼 시원한 공기, 눈이 부시게 맑은 하늘, 동화같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아름다웠다. 잊고 싶지 않아 이 순간을 눈으로 마구 찍었다. '이 순간만은 잊으면 안 돼.' 지금의 감각과 감정을 내 몸 어딘가에 새기고 또 새겼다.



피터는 지금 감정이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그에게 매일 이렇게 하늘을 나느냐고 물었다. 그는 날씨가 나쁘지 않으면 많은 날을 이렇게 보낸다고 말한다. 너는 정말 멋진 직업을 가졌구나 진심 어린 부러움을 뱉자, 피터도 자신의 직업이 정말 좋다고 답한다.


바람을 가르며 자연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경험,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자연의 일부가 된 순간.

내가 땅 위에 살아가는 생물일 때에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곳이 이렇게 넓고도 작은 곳인지. 내가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눈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먼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이 이토록 좋았던 적 있던가.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내가 우주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때때로 엄청난 용기가 되곤 한다.


누군가는 평생을 머물다 가고, 누군가는 잠시 스치다 가는 곳. 지구의 모든 공간은 인간이 있어 밉기도 했지만, 인간이 있어 아름답기도 했다. 자연은 내게 무언가를 마냥 미워하기보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여전히 꿈꾸게 했다.



"매일 지지고 볶고 살지만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는 한정된 시공간을 살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예요. 어차피 우주 먼지로 살다 가는 거라면 행복한 우주 먼지가 되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삶의 모토가 된 글 중 하나인 천체 사진가 권오철의 글을 많은 사람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샤모니의 여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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