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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어푸 Sep 11. 2020

고흐의 죽음을 함께한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

 고흐 마을로 유명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 날이다.

 기나긴 지하철 여정을 떠나기 전, 나는 집 근처의 빵집에서 바게트를 하나 샀다. 갓 구운 빵을 한입 베어 무니 고소한 향이 입 안에 퍼진다. 이런 빵을 그냥 먹으니 안 되겠다 싶어, 나는 행선지를 바꿔 세느강으로 향했다.


 뛸르히 공원을 지날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종이를 흔들며 나에게 다가온다. 순식간에 나를 둘러싸고 종이를 얼굴 앞에 들이댔다. 나는 한 손에는 빵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그들을 뿌리칠 겨를없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 순간 그들 중 한 명이 나의 가방 끈을 훅 당겼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겁도 없이 한국말로 욕을 뱉었다. 그들은 가방을 부여잡고 고래고래 알 수 없는 말을 뱉는 나를 비교적 순순히 놓아줬다. 나를 향해 침을 뱉고 손가락 욕을 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털리지 않았음에 안도해야 했달까.



 빵 하나 먹으러 가다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다가도, 맞다 여긴 파리였지. 그 어느 곳보다 인종차별이 심하고 지하철, 길거리, 박물관 어디서든 소매치기가 도사리는 곳이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되새겼다. 아직 벌렁이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나에겐 빨리 세느강의 풍경이 필요했다.


 평안한 세느강의 물결 앞에 다리를 동동 거리며 앉았다. 몇 백 원짜리 바게트 빵은 파리를 낭만의 도시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맛이 좋았다. 잔잔한 세느강과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나는 파리의 명과 암을 곱씹었다.



 짧지만 정신없는 아침을 뒤로한 채 나는 오늘의 행선지인 고흐 마을로 향했다. 지하철과 기차를 두 번씩 갈아탄 끝에 도착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관광객 하나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홀로 골목을 걸었다.


 골목 끝에는 고흐의 작품으로 보았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가 있었다. 나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교회 안에는 마을의 아이들을 앉혀놓고 클래식이 연주되고 있었다. CD를 틀어놓은 듯 선명하고 아름다운 피아노의 소리에 한참을 매료됐다.

 마을의 아이들은 아주 무료한 표정으로 연주를 듣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 나는 잘 듣지도 않는 클래식에 감동하고 말았다. 어릴 시절 나도 이런 음악을 지루하다 여겼는데 오늘 이렇게 큰 감명을 받은 건 내가 그만큼 자랐다는 의미일까, 혹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주는 단순한 벅차오름일까. 아마 둘 다인 것 같다.



 교회 밖으로 나왔다. 나는 고흐의 그림 속 장면 앞에 서있었다. 고흐와 내가 같은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을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생을 마친 고흐처럼 나 역시 언젠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이 자리를 지킨 교회는, 앞으로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변하는 세상 속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는 건 잔잔한 위로가 되곤 한다.


 이제 나는 밀밭으로 향한다. 비는 오지 않지만 이미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고흐가 생을 끝낸 곳이기도 한 밀밭. 하늘이 마냥 밝았으면 그의 마지막이 떠올리지 않았을 만큼 밀밭은 드넓었고 푸르렀다. 하늘이란 커다란 판. 저 먼 곳에는 화창한 뭉게구름이 떠있다. 내가 서있는 이곳 위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기묘한 일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밀밭 한가운데에 서서 고흐의 마지막 심정을 짐작, 아니 상상해본다. 고흐가 외롭게 숨을 거둔 이곳에서 그를 떠올려 본다.


 이곳에선 카메라를 잠시 내려두고 햇살을, 바람을, 풀의 흔들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척박한 땅 위에 피어있는 두 송이의 붉은 꽃이 있었다. 잎이 찢어지고 시들어진 한 송이 옆에는 상처 없이 온전한 다른 한 송이가 있었다. 마치 위태로운 고흐를 지켜줬던 테오 같았다. 고흐는 꽃이 핀 이 자리에서 숨을 거뒀을까? 그 외로운 마지막을 여전히 테오가 지켜주고 있는 걸까?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졌지만 결국 내리지 않았고, 멀게만 보였던 화창한 뭉게구름은 서서히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을을 떠나기 전 나는 밀밭 한편에 있는 벤치에 앉아 아빠에게 긴 엽서를 썼다.


"벌써 한국을 떠나온 지도 40일이 지났어요. 생각해보면 끝이 없을 것 같은 시간도 어느샌가 다 지나있고, 이번 여행의 끝도 보이네요.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아빠 생각이 많이 나요. 제 여행의 중심에는 항상 아빠와 떠난 여행이 있어요. 아무것도 몰라서 서툴렀고, 고생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그때를 가장 행복하게 기억할까요? 나에게 있어 최고의 여행 파트너는 아빠가 아닐까 싶어요. 서툴고 실수해도 옆에서 괜찮다고 믿어주던 아빠가 있어서 낯선 시골마을도 떠날 용기가 생기고, 조급하고 불안한 나를 아빠가 든든히 바라봐준다 할까나. 그 시간들로 인해 내가 있고, 우리가 있을 수 있었어요.

 아빠 지금까지 일이 잘 풀릴 때도, 어려울 때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줘서 고마워요. 부족함 없이, 행복이 넘쳐흐르게 살게 해 줘서 고마워요."



 여행을 하며 처음으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던 순간이다.

이곳에 떠나오기 전 일 년 동안 힘들었던 내가 떠올랐다. 괜찮아지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지나고, 결국 이곳에 떠나온 내가 있었다. 누군가 끝을 보낸 이 곳에서 여전히 작은 희망을 잡고 살아가는 수많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그대가, 그럼에도 살아가는 그대들이 떠올랐다.



 복잡한 슬픔을 이곳에 묻어둔 채 나는 다시 파리로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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