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AI를 두려워하는 이유
이건 모두 경험 탓이야
1.
오래된 영화 중에 <에이 아이>라는 작품이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인데, 어린아이 로봇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황폐화된 지구. 자원이 부족해져 세계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는 대신 ‘진짜’ 자식 같은, 부모를 사랑하게끔 제작된 로봇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이 중에서도 감정을 가진 최초의 로봇이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가 그렇듯, 데이비드 역시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인간이 되기를 소원하가 쓸쓸하게 끝을 삶 혹은 시간의 끝을 맺는다.
이 영화가 나오고 꼭 11년 뒤인 작년, 김영하 작가가 <작별인사>라는 작품을 발간했다. 마찬가지로 로봇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작품의 전개와 결말은 <에이 아이>와는 사뭇 다르다. 결국 부모에게 버려진 데이비드와 달리, <작별인사>의 주인공 철이는 부모의 사랑 아래 자란다. 그러나 결국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란 근본적인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과거의 데이비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정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 빌었다면, 철이는 답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난다.
2.
“사람처럼 감정을 가진 로봇이라면, 인간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작중 데이비드를 처음 탄생시킨 과학자에게 기자가 건넨 질문이다. 과학자는 ‘로봇이니 책임질 필요가 없다’ 대답한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생각하고 느끼는 건 인간의 고유 영역이며 그렇기에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은 우위를 갖는다고, 인류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데 뼈와 살 대신 고철과 신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신이 창조하지 않았다는 까닭으로, 사랑과 슬픔을 아는 존재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일종의 궤변이 아닐까.
동시에 <에이 아이>의 기자가 던진 이 질문은, 스필버그의 영화가 개봉하고 김영화 작가의 소설이 출간되기까지의 10년이란 시간을 연결한다. 결국 ‘우리는 생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섭리인 생명이란 가치를, 인간이 공장에서 찍어내듯 공산품처럼 만들어낼 수 있게 됐을 때 발생할 여러 윤리적인 문제와 혼란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고민은 생명에 우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계급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곤 한다.
3.
요컨대 최근 생성 AI가 급속도로 발전하며 우리가 느꼈던 감정을 생각해 보자. 이전의 두 작품이 철저히 인간이 우위에 선 입장에서 휴머노이드를 바라보며 인간적인 SF를 상상했다면, 최근의 양상은 정반대다. 언젠가 기술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계급론적 두려움이 반영된 우려에 가깝다. 물론 공상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일 지켜보았기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철기시대부터 산업화가 이뤄지기까지의 인류가 쌓아왔던 일종의 karama가 작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개화하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의 망령을 불러일으킨 20C의 담론이다. 21C도 마찬가지다. 사라진 계급을 대체하는 건 자본이다. 이처럼 인류는 우등한 집단이 우위에 선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인류의 빅데이터를 통해 탄생할 생성형 AI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무결과 도덕의 인류로 나아가자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AI의 발전과 기세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가 조금은 씁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