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풍선을 놓친 것일까, 아니면 잡으려는 것일까.’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나서야, 풍선을 놓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의 뒤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소녀가 풍선을 일부러 놓은 것이라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유행처럼 번진 적 있다. 나도 대세를 따라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봤다. 하지만 실패했다. 여전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옷을 사고, 무난한 한 끼 대신 어떻게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배달앱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량을 넘겨도 순간의 즐거움을 이기지 못해 한두 잔을 더 마신다. 결국 내 자취방은 발 디딜 틈 없이 짐이 쌓였고 몸무게는 인생 최고치를 찍었으며 자주 숙취에 시달리는 중이다.
‘사소하고 다양한 욕심, 그러나 그 후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내일모레(에 글피까지 살짝 더하면) 곧 서른인데, 그동안 삶에 부대끼며 겨우 깨달은 사실이다. 욕심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참 어렵단 걸 매 순간 체감한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다. 명료하고 간단한 글을 위해선 꾸밈말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멋지고 의젓한 말이 없을까’ 고민하며 글을 썼다 지웠다 하는 중이다.
이렇듯 나는 여전히 욕심 내고 싶은 욕심이 가득하다. 주말마다 유기견 보호소를 방문해 봉사하는 직장인을 보며, 폐지를 주워 모은 돈을 다른 소외계층에게 기부하는 시민을 보며. 그리고 자신이 몸담은 예술계의 관행을 지적하기 위해 스스로의 작품을 파쇄한 뱅크시를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까닭이다. 나 또한 그들처럼, 내가 상상한 작품의 소녀처럼 손에 든 풍선을 미련 없이 날려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요컨대 불교에서는 혼자 열반에 이르기보다는, 중생과 함께 세속의 때를 벗겨내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렇기에 종종 나는 우리 사회에서 욕심을 내려두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정 종교를 좇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누군가의 희생과 용기로 인해 좀 더 나은 세상이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저 길고양이가 귀엽다며 카메라 들이밀기 바쁘고, 기부는 부자나 하는 것이며, 카르텔에는 관심도 없던 나를 돌이켜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도 갤럭시 버즈를 귀에 꽂고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아이패드로 글을 쓰는 ‘풀소유’의 내가 쓰는 일종의 반성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