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대만 일기

대만 일기(1) - 물 뱉는 건조기

3개월 대만 단기 어학연수 기록장

by 때굴

습한 날씨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언젠가 이곳으로 여행 왔을 때, 거리에 늘어선 습기에 거뭇해진 가정집을 보며, 한 번쯤은 저기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은근히 습기를 머금은 작은 빌라 4층의 작은 방에 머물고 있다. 얇고 눅눅한 이불, 솜이 제멋대로 뭉쳐있는 베개, 낡은 의자. 무던한 성격이 아니라면 ‘아, 월세에 비해 방 컨디션이 참 별로야’라고 생각할 만한 곳에서 지내는 중이다.


셰어하우스에 도착한 첫날. 내 방에 손때가 잔뜩 묻은 건조기 한 대가 놓여있었다. 힘겹게 돌아가는 건조기 아래로는 물이 넘쳐 흥건했다. 침대 위에 짐을 내려두고 집주인을 불렀다. 나는 만다린을 못했고, 집주인은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건조기를 가리키며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6살이 어린 집주인은 화들짝 놀라 연신 ‘쏘리’를 외치며 바닥을 닦았다. 습한 대만 날씨에 불편해할 세입자를 위해 마련했을 건조기. 하지만 물을 다 토해낸 탓에 그의 호의는 해프닝으로 갈음되고 말았다. 결국 건조기는 집주인 방으로 치워졌다.


대만에 도착한 첫 주, 집주인과 룸메이트는 어학당 개강 전까지 나를 데리고 대만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줬다. 본인들의 여가 시간과 주말을 빼가며, 심지어는 일주일 내내 아르바이트와 일에 시달렸던 때마저 ‘우리도 재밌다’며 함께 전시장에 가고, 야시장에 갔다. 덕분에 대만 사람들의 시선이 녹아든 전시를 볼 수 있었고, 비슷한 메뉴를 파는 상점이 많은 스린 야시장에서 가장 맛있는 파파야 밀크를 파는 가게를 알게 됐다. 또한 ‘셰셰(감사합니다)’에 ‘부커치(별말씀을)’라 해야 할지 ‘메이꽌시(괜찮습니다)’라고 해야 할 지도 헷갈리는 와중에 ‘샤오스(웃겨 죽겠다)’만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됐다. 엉망진창인 성조와 한국 억양이 잔뜩 묻은 발음이었지만, 샤오스를 외칠 때만은 대만에서 20대를 보내는 평범한 누군가가 될 수 있었다.


여전히 습도가 높은 날이면 건조기는 물을 토해낸다. 며칠 전에도 건조기 밑이 물로 흥건했다. 메신저에 ‘너 방에 물 내가 닦음ㅋㅋ’이라는 말을 보내는 게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이곳에 도착한 지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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