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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Mar 14. 2020

꿈도 꿔주나요

꾸고 꾸는 것이 꿈

꾸다 1_꿈을 보다

  '꿈이 뭐냐' 이 질문이 가진 의미 변화야말로 사회의 인식이 바뀌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어릴 적 꿈은 대개 장래희망의 동의어였다. '꿈이 뭐니'는 곧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말과 같았다. 나의 꿈은 PD가 되는 것이었다. TV 속 '무한도전'을 즐겨보던 초등학생 때부터, 넷플릭스의 청소년 관람 불가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된 지금까지. PD 이외에 다른 꿈을 바란 적은 없다.


  그런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어느 순간부터 미디어는 힐링에 집중하며 자아 찾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를 그려나갔다. 여행을 떠나고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며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집중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비단 직업만이 아닌 취미와 관심사, 성격 등 다양한 재료들로 자신을 만들고 표현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꿈이 뭐냐'는 질문에 장래희망만 말하는 것은 트렌디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꿈=PD'였다. 틀에 갇힌 나는, 덕분에 다른 대답을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해야 했다. 적어도 어떤 PD가 되고 싶은지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쉽지 않았다. 문제였다. 오랜 시간 바랐던 꿈의 청사진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도 큰 문제였다. 자소서 1번 문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하필 PD가 되고 싶었을까? 수많은 이유들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시작은 그랬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특별해 보였고, 그들을 위한 스테이지를 제작하는 카메라 뒤의 누군가는 더욱 멋있어 보였다. 물론 지금은 이런 가벼운 이유만으로 PD를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에는 참 속물적인 이유로 PD가 되고 싶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시작점을 딛고 나니 요즘의 꿈과 관련된 질문에 대답하기 훨씬 수월해졌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꿈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숙제가 있었다. 이제 꿈이 아닌 전반적인 삶을 바라봤을 때 바라는 것을 알아내야 했다. 장래희망을 이루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이자 끝이라고 생각했던 내게는 정말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조금은 염치없지만 다른 이들의 삶을 살펴보기로 했다. 대체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꾸다 2_뒤에 도로 갚기로 하고 남의 것을 얼마 동안 빌려 쓰다.

  주변을 보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취미는 꼭 빠지지 않고 챙기는가 하면, 분명 같이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갔는데 어느새 제2외국어 자격증을 땄다던지 하며 말이다. 새내기 때는 모두 똑같이 병아리처럼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동기들도 누구는 세계 여행을 다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


   처음에는 마냥 부러웠다. 다음에는 질투가 났고 결국에는 그들과 비슷해지고 싶었다.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삶을 좀 흥미롭게 살아보고 싶었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고 시간을 즐겁게 보내 수 있는 취미 하나 정도 가지고 싶었다. 외국어도 하나 정도 할 수 있으면 좋고. 그렇지만 똑딱이는 시계처럼 살던 버릇은 쉽게 고쳐지질 않았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한 번은 맞는다던데, 나는 그냥 제멋대로 빨리 가고 싶으면 뛰고 느리게 가고 싶으면 잠시 멈춰있는 시계였다.


  작년 10월쯤은 더구나 잡다한 걱정들로 무기력증이 더욱 심할 때였다. 남들은 힘든 시기도 잘 이겨낸다는데 나만 나약하고 의지가 없어 이런가, 참 찐 맛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랜 시간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PD라는 꿈도 지겨워질 참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도서관에서 나와 잠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여느 때와 달리 학교가 떠들썩했다. 축제날이었다. 언덕 너머 노천 극장에서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나는 이렇게 무채색의 삶을 사는데, 저기 언덕 위의 사람들은 조명처럼 반짝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인 발걸음이었다. 무거운 책이 든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노천 극장으로 걸어갔다. 초대 가수가 누구인지, 지금 무슨 공연을 하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열정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뜀박질을 하는 저 무리에 섞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날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순간, 많은 것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초대 가수의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평소 즐겨 듣던 밴드라 반가운 마음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노천 극장 무대는 참 좁았다. 그런데 그 좁은 무대가 스타디움이라도 되는 듯 정말 열심히 호응을 유도하고, 이리저리 누비고 다녔다.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해 공연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저런 게 바로 열정이구나 싶었다.


  폭발적인 감정을 가까운 거리에서 느끼게 되면 그 여운이 참 오래 가게 된다. 작년 10월, 그들에게서 느꼈던 열정은 굉장히 느리지만 꽤 많이 나의 무기력함을 바꾸어 놓았다. 공연장에서의 열정이 옮아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잠시 '꿔왔다'. 그때의 열정과 열기가 너무 부러워서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빌렸다. 그분들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 이후 잠시 방치해뒀던 내 인생을 가꾸기 시작했다. 포기할까 생각했던 봉사활동을 다녀오고, 동기와 제법 큰 교내 프로젝트도 성사시켰으며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더 많지만 취업준비도 나름 재미있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어떤 삶을 살고 싶다는 방향키를 찾았다. 힘들었을 때 우연히 찾아와 '열정'을 빌려준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동안은 꿈이 나를 짓누르는 듯이 느껴졌다. 다 그렇겠지만 언론사의 취업문은 너무나도 좁고, 요구하는 직무 능력도 벅찬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꿈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렇지만 PD라는 꿈의 청사진을 그리고, 열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 뒤부터 부담감이 많이 사라졌다. 언젠가는 PD가 되어 미디어의 파급력을 선한 영향으로 쓸 수 있는 날을 꿈 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10년을 넘게 바랐던 꿈인데 1,2년 더 기다리는 것이 대수일까 싶기도 하다. 결국엔 지금도 다 과거의 추억이 되어있지 않을까. 미래 어느 순간, 나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을 그때가 되면 내가 몰래 꾸어왔던 그들의 열정을 좀 더 크게 갚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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