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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Mar 15. 2020

인턴 생존기 '쭈굴방탱'

03.발제 잘해라.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너 발제를 그렇게 못해서 뭐라도 되겠어?"
  


  농담 반, 진심 반.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장난스럽게 건넨 선배의 한 마디. 당황스럽고 민망하기보다는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왜냐면 정말 못하기 때문이다. 발제는 기사가 될 만한 거리를 찾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기존의 사실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우리 부서 같은 경우, 한 발짝 더 깊게 들어가 기사 거리를 찾아야 한다.


  '코로나 19로 드라이브 스루 선별 진료소 등장'이라는 사실로는 기사를 쓸 수는 있어도 영상을 만들 수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다른 사례와 엮어 영상을 구성하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색 진료소를 찾아서 좀 더 정보와 볼거리가 있는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다 못해 해외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라도 끌어와야 한다. 굳이 이미 나온 이야기를 다시 영상으로까지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인턴이 되고 나서 사회생활도, 영상 편집도 어려웠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이 '발제'였다. 제시한 기사 거리가 엎어지는 것을 두고 '킬'이라는 말을 한다. 영상 편집이 끝난 날은 곧바로 발제에 들어갔는데, 두세 시간 정도 발제 거리를 찾아 올리면 곧바로 킬이 됐다. 이런 '발제-킬'의 과정을 세 번 정도 거치면 어느덧 퇴근할 때다. 게임에서 공격을 받아 죽고 재부팅을 두세 번 정도 하다 보면 PC방의 이용 시간이 끝나는 것처럼.


  같은 언론 직종이라지만 PD가 요구하는 능력과 기자가 요구하는 능력은 꽤 달랐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기도 했다. PD를 준비하던 내게 이런 것들은 모두 처음 해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인턴 동기들은 척척 잘 해내는 것 같고. 여러 모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서 학원도 다녀보고 선배를 붙잡고 가르침을 달라 늘어져도 봤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정답, 결국은 '양치기'였다. 많은 기사를 접하고 어떤 발제가 킬 됐었는지 오답노트를 작성해서 분석하며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타고난 직감과 센스가 필요했다면 진작 포기했겠지만, 그래도 양치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각종 외신을 찾아보고 다른 회사의 디지털 뉴스를 참고하고 그동안 킬 되었던 나의 발제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제가 통과됐다. 그것도 꽤 괜찮은 반응과 함께. 주제와 내용이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발제로는 인턴 4개월 만에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라 기분이 얼떨떨했다. 벅찬 기쁨과 함께 이번 영상을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조회수는 처참히 낮았다. 그리고 다음 발제는 또 '킬'당했다. 아쉬웠다. 내심 반응이 좋을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기왕 지나가버린 기사, 이번에는 왜 조회수에서 '킬'을 먹었는지 오답노트를 쓸 차례다. 그다음에는 발제가 왜 또다시 킬을 당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드라마에서처럼 치열하게 고민하는 장면 뒤, 바로 성장의 기쁨을 외치는 장면으로 바뀐다면 좋겠지만, 삶은 좀 다른 것 같다. 인생은 화면에서 보이는 하이라이트보다 편집돼서 삭제된 장면들에 더 가깝다. 하이라이트는 결과, 편집된 삭제본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편의 드라마가 끝난 뒤를 생각해보면 삭제본이 영 의미가 없는 것들은 아니다. 미처 시청자들이 몰랐던 촬영장의 뒷 이야기나 해프닝을 담은 흥미로운 메이킹 필름으로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돌이켜보면 즐겁고 의미 있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거치는 길고 긴 준비의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방송국에 입사한 뒤, 그리고 나의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을 때 지금을 돌이켜보면 부족함도 많았지만 그만큼 볼만한 과정들이지 않을까. 끝내주는 드라마 너머의 볼만한 메이킹 필름을 만들기 위해서 오늘도 글을 쓰고, 기사를 읽고, 세상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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