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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20. 2023

사과

버스도 길을 잃는다


눈을 뜨니 오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시외버스가 톨게이트를 지난다. 집에 왔다는 안도감. 이제 답답한 버스를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해방감.


“여러분 죄송합니다.”


누군가 사과한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지 못했다. 옆자리를 두리번거린다.

“제가 길을 잃었습니다.”

조금 더 큰 목소리다. 버스 기사님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기사님이 왜 저런 말을 하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잘못 들었나?


“나가야 할 길을 지나친 것 같아요.”


버스 기사님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좀 더 큰소리로 전달한다.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몹시 당황스러운 듯하다. 그제야 승객들이 하나둘 통로 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혹시 승객 분 가운데 길 아는 분이 계신가요?”

모두 침묵한다.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 할 말을 잃어서. 길을 몰라서라기보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어서. 무엇보다 짜증이 난다. 버스에서 4시간 가까운 시간을 보냈는데, 집을 앞에 두고 다시 거리를 헤매야 한다는 사실이 피로를 더한다.


 버스 기사님이 재차 도움을 청하자, 제일 뒷자리에 있던 남자 승객이 소리친다.

“쭉 직진하세요!”

역시 짜증 섞인 목소리다. 다시 기사님이 뒷자리를 향해 소리친다.

“죄송합니다. 혹시 제 옆으로 와서 길을 좀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버스 안이 두 사람의 목소리로 메아리친다. 누가 봐도 버스기사와 승객이 나눌 법한 대화는 아니다. 나는 이 상황이 황당한데 또 엉뚱한 코미디 같아서 혼자 헛웃음을 치고 만다. 제일 뒷자리 승객은 혼잣말로 기사님을 타박한 후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버스 기사님 바로 뒤편, 제일 앞자리에 앉아 길을 안내한다.

“매번 터미널과 터미널만 오가니까요. 한 번 길을 놓치고 나니.”

기사님이 멋쩍게 대답한다.

버스는 도착 시간보다 20분 정도 더 서울 시내를 돈다. 눈에 익은 길들은 또 조금 낯설다. 기사님의 거듭된 사과에 나는 어느새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마음이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잠깐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하거나. 그러다 놓치고 마는. 그렇게 떠나보낸 사랑이 내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가장 먼저 당신에게 문자한다.

“미안”

영화 관람료와 비슷한 택시비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택시 기사님은 내게 좋은 일이 있느냐 묻는다. 오늘 있었던 일은 좋은 일이었을까. 택시미터기 요금이 올라가는데, 나는 하마터면 ‘기사님 조금 돌아가도 괜찮아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여행의사건

#사과

#달콤한용서를부르는새콤한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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