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오래 된 당신의 말
스콜이 쏟아졌다. 버스는 정체되는 도로 위에서 달리다 멈춰서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오토바이들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여기저기 짧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눈치를 보던 가이드가 말했다.
"어느 날 저녁 국왕이 TV에 나와 안전모를 꼭 쓰라고 했어요. 다음날 어디서 구했는지 모두들 안전모를 쓰고 나타났어요. 안전모가 없는 사람은 냄비라도 쓰고 나왔더군요."
우리 모두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차창 너머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보며 보이지 않는 믿음에 대해 생각했다. 당신을 향한 맹목의 사랑이 내게 안전지대가 되어주리라 믿었던 적이 있다. 당신이 안전모 대신 냄비를 쓰라고 했으면 나 또한 그리했을 것이다. 그조차 없이 폭풍 속을 걸으라 했으면 그리했을 수 있다. 그렇게 하루를 더 잇 댈 수 있었다면.
“본래 새로운 건 없잖아. 낡아지고 나면 새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믿게 될 뿐이야.”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오래도록 당신의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이유없이.
우리는 그렇게 낡고 닳아 지금은 사라진 기억의 사람들.
버스는 다시 달렸고 또 멈춰 섰다.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다. 차창에 빗방울이 맺혔다. 가이드가 말했다.
"태국 차의 에어컨은 강도 조절 장치가 없어요. 그래서 강하거나 끄거나."
누군가 주섬주섬 옷가지를 꺼냈다. 바스락 바스락. 메마른 산소.
방콕의 소나기는 2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여행의사물
#안전모
#지켜줄거라는믿음또는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