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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저녁뜸 잔잔한 바다처럼

2025년 1월 15일 :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을 읽다가

by 박상준


...마치 저녁뜸 잔잔한 바다처럼...
...아이덴티티를 추어올리는 일...
...무르춤하게 멈추어 서는...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을 읽다가 몇몇 문장에서 책읽기를 멈춘다. ‘...마치 저녁뜸 잔잔한 바다처럼...’도 그런 문장. 번역가가 사용한 단어가 말을 건다. 김경원번역가는 '저녁뜸'만이 아니라 어떤 단어들을 슬그머니 집어넣고는 ‘이런 단어도 있어’ 라고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 요점은 ‘슬그머니’다. 몰라도 되는데 알면 좋잖아, 관심 없거나 그냥 읽고 싶으면 신경쓰지마 같은 어투로.


번역 글에서 종종 의미를 모르는 단어를 보곤 한다. 내 경우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한다. 단어가 너무 튀어서 의미를 찾아보게 되는 경우. 이때 ‘튀어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불쑥 튀어나온다는 뜻.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글을 읽다가 (자빠져서 무릎이 깨진 후) 뒤를 돌아보게 하는 단어. 모르는 단어를 마주하는 건 감사한 일일 수 있는데 왠지 이럴 때는 읽기의 흐름을 빼앗긴 것 같아서 얼마간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깨진 무릎부터 만져보게 되는 거지.


두 번째가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기시 마사히코 저/김경원 역. 위즈덤하우스)과 같은 경우인데 문장의 흐름 안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낯선 단어. 그러니까 그 뜻을 모른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 단어.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얼추 유추할 수 있는 단어 그러나 한 번 정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저녁뜸'이나 '추어올리는'이나 '무르춤하게' 같은.


저녁과 뜸은 모두 아는 단어들. ‘저녁’은 해가 저물 녘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사이를 말하고 뜸은 ‘뜸 들이다’라거나 ‘시간이 뜨다(뜸)’를 뜻하겠지. 그러니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세계가 잠깐 뜸을 들인다거나 시간이 뜬다는 의미라서 문장 위로 스윽 미끄러지듯 나아가버리면 그만인 경우다.


그러므로 ‘저녁뜸’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한 번 더 찾아보는 건 그저, 그리고, 그래도 내가 글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서, 글밥 먹는 사람이 ‘저녁뜸’도 몰라? 라고 이야기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그렇다고 밥숟가락을 놓을 수는 없잖아요) 이런 경우 기꺼이 읽기를 멈추고 그 단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새겨보고 싶어진다.


그냥 지나가도 돼, 라고 하니까 가서 보고 싶어지는 거. 할머니가 ‘슬그머니’ 넣어주는 용돈처럼. 그런 돈은 쓰임이 아주 요긴한 경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서. 이를 증명이나 하듯 이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너무 낭만적이다.


저녁뜸 : 저녁 무렵 해안 지방에서 해풍과 육풍이 바뀔 때에,
바람이 한동안 자는 현상


바람이 자는 현상이라니.(물론 '자다'의 뜻 가운데는 ' 바람이나 물결 따위가 잠잠해지다'가 있기는 하다.) 연애편지도 아니고 사전 속 단어의 정의가 이렇게나 달콤해도 되는 건가? 바다의 바람과 육지의 바람이 저녁 무렵 해안에서 바통을 터치할 때, 티 타임이라도 가지려는 듯 다음을 위해 잠깐 뜸을 들이는 그 시간을 ‘바람이 한동안 잔다’고 표현하다니.


이건 사전의 낭만이 아니면 뭐라고 표현할까? 왜냐하면 위의 정의는 우리말샘국어사전의 정의이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는 ‘저녁 무렵 바닷가 지방에서, 해풍(海風)과 육풍(陸風)이 바뀔 때 바람이 한동안 멎어 잠잠해지는 현상.’이라고 정의했으므로.(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곧은 정의 또한 의미가 있지만)

오늘 저녁뜸에 나는 ‘아마도 지금이 저녁뜸이겠군’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서 김경원 번역가를 검색해봤는데 동서문학상 평론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던 문학평론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유토피아)가 있고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우치다 타츠루/바다출판사) 등을 번역했다. 어, 우치다 타츠루, 우치다 타츠루...’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유유)의 그 아저씨군.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를 이 아저씨가 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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