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햇볕 쏟아지던 날들

발레리 페리스, 조나단 데이턴 감독의 <미스 리틀 선샤인>

by 박상준

#intro

일곱 살 소녀 올리브의 미인대회 도전기를 유쾌하게 풀어낸 로드무비다. 저마다의 상처와 고민을 안고 사는 올리브의 가족은, 집안 형편으로 인해 비행기 대신 비좁은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미인대회가 열리는 로든도해변으로 떠난다. 낡은 차는 길 위에서 고장이 나고, 꾹꾹 눌러두었던 각자의 문제가 차례로 폭발하지만, 이들은 어린 올리브의 꿈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만은 멈추지 않는다.



#1.삶은 계속 되어야 하는가?

“ 네 총명함이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예뻐서 널 사랑하는 걸....
우린 내일 재밌을거야. 남들이 뭐라하든 신경쓸 것 없어”

미인대회장으로 가는 작은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 안입니다. 영화는 막 중반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올리브(아비게일 브레스린) 옆에는 할아버지 대신 프랭크 삼촌(스티브 카렐)이 앉아 있어요. 예기치 않은 상실을 겪고 가족들은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불굴의 일곱 살 소녀 올리브마저 다소 지쳐 보입니다. 올리브의 머릿속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떠돌고 있지 않았을까요. 어른들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런 질문들일 겁니다.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가? 미인대회는 계속 되어야 하는가?


올리브는 곁에 있던 삼촌에게 물어요. 올리브의 삼촌은 마르셀 프루스트를 연구하는 유명한 석학입니다. 그렇다면 답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을 겁니다.

“삼촌, 천국이 있을까요?

“확실히 말하긴 어렵단다. 아무도 모르니까.”

‘학자’다운 대답입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올리브의 대답은 어른들의 착각을 일깨웁니다.

“난 있다고 생각해요.”


올리브는 삼촌에게 질문하려던 게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고민하고 질문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걸 수 있습니다. 그게 성장일 테니까요. 예를 들면 할아버지(알란 아킨)의 말씀 같은 것을요. 올리브는 ‘어렸을 때 그런(마약) 걸 하는 건 미친 짓이지. 늙어서는 마약 안 하면 미친 거지.’라고 주장하는 유별난 할아버지가, 결국은 천국의 문을 열었을 거라 확신해요. 미인대회가 걱정된 올리브는 지난밤 할아버지에게 ‘저 예뻐요?“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답해주었습니다.

“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소녀란다. 네 총명함이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예뻐서 널 사랑하는 걸.
...우린 내일 재밌을거야. 남들이 뭐라하든 신경쓸 것 없어.”

그때 우리는 올리브의 미인대회가 지속될 걸 압니다. 설령 그 미인대회가 어른들의 욕심이 만든 상술일지라도 말입니다.



#2.희망을 응원하는, 미스 리틀 선샤인

“힘겨웠던 시절들이...그게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대”

우리는 영화 내내 가족의 한 사람이 되어 올리브를 응원합니다. 올리브가 세상의 부조리함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올리브가 우리를 위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위기에 처한 엄마와 아빠를 위로하고 꿈을 잃어버린 오빠의 등을 두드려주지요. 그러니 이어진 장면에서 삼촌이 올리브에게 천국을 묻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나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삼촌의 이 말은 진심일 거예요. 그는 일주일 전에 연인에게 차이고 자살을 시도했었으니까요. 그에게 천국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여정이고,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연속이었으며 다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으니까요. 올리브가 단호히 대답합니다.

“예, 약속해요.”


신이 아니고서야 천국을 약속할 수 있는 걸까요? 하지만 올리브는 확신해요. 삼촌과 올리브가 대화하는 이 장면을 무척 좋아합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을 꼭 봐야하는 이유는 백 가지도 더 제시할 수 있지만 이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런 영화입니다. 일곱 살 꼬마 숙녀가 자칭 전미 최고의 마르셀 프루스트 학자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에게 ‘천국’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삼촌 프랭크는 여행이 끝나갈 때 즈음 자신의 조카이자 올리브의 오빠인 드웨인에게 프루스트의 사례를 빌려 자성하며 말할 수 있는 거겠지요.

"힘겨웠던 시절들이...그게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대"


올리브는 가족의 걱정 속에 미인대회장으로 걸어나갑니다. 저는 대회장으로 나아가던 올리브의 결연하고 희망찬 뒷모습 또한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기억합니다. 그녀는 피하지 않아요. 무대를 향해 위풍당당하게 걸어나갑니다. 그 뒷모습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희망을 비추는 미스 리틀 ’선샤인’입니다.




# 페이드아웃 여행이 끝났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사후를 다룹니다. 사람은 죽으면 림보역이라는 중간계에서 일주일을 머문 후 사후의 세계로 떠납니다. 그들은 일주일 동안 생전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택해 영화로 만듭니다. 인터뷰 과정에서 자신들의 생을 반추하며 고민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평생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보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 림보역에 다다른 스스로를 상상합니다. 내가 택할 단 하나의 추억은 무엇일까? 저는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마지막 여행을 떠올리며 고심합니다. 시간 순서가 행복의 척도일 수는 없지만, 마지막은 끝이라서 가장 명징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함께 한 생의 축약이자 집약 같아서, 그날들을 떠올리면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의 마지막 장면은 희망찹니다. 그들은 여행 중에 할아버지를 잃었고, 아버지는 파산했으며, 하나 뿐인 자동차마저 폐차 직전에 이르렀지만 기어가 고장 난 차를 모두 같이 밀고 있습니다. 물론 올리브도 함께요. 그리고 차가 출발하면 여행 내내 그러했듯 한 사람씩 차에 올라탑니다. 제일 먼저 올리브가 힘차게 달려 도움닫기 합니다. 이번에는 미인대회 참가 전과 달리 할아버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냅니다. 이제부터 소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어른이 되어갈 것입니다. 올르비가할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우리는 여행이 끝날 때마다 한 뼘씩 자랍니다. 모든 여행이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무언가를 잃고 떠났을 때, 또는 여행에서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우리는 그 여행의 끝에서 한 뼘씩 자라납니다. 아마 올리브와 올리브의 가족은 그들이 생을 마감하는 날에 분명 그날의 여행을 떠올릴 겁니다. 아니 살아가는 내내 그 주말의 여행은 이들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추억들로 인해, 그들은 떨어져 살아가는 날이 오더라도 같이 여행할 것입니다. <노매드랜드>에서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이 그러했듯이요. 가끔 제게서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그럴 때 당신들과 함께 한 가장 빛나는 순간, 소중해서 마지막까지 남겨두고픈 그날의 여행을 떠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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