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닿을 듯 가닿지 않는 사랑은 풀리지 않은 암호처럼 간절하다.
“아셔야할 것 같아서요. 아셨으면 하니까요. 아셔야 해서요.”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피아베 전쟁기념물 주변을 거닐며 올리버(아미 해머)에게 같은 말을 반복한다. 올리버가 들을 수 있게 세 번, 올리버에게는 들리지 않는 혼잣말로 세 번. 사랑을 알아간다는 건 슬픔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 생겨나는 건 ‘달콤한 사탕’처럼 사라질 것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용을 지불하고 시간을 상실하며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이 끝났을 때 남는 건 몇 장의 사진보다 큰 공허다. 이제 그곳에 내가 있지 않다는,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텅 빈 마음을 만든다. 그것은 후회일까?
“난 네가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
올리버는 사랑을 시작하며 엘리오에게 말한다. 머잖아 빈자리를 들여다볼 일이 생길 거라고. 하지만 어떤 슬픔은 절망 안에 희망을 품고 있어 사랑이기도 하다.
“지금은 슬픔과 아픔이 있어. 그걸 없애지마라. 네가 느꼈던 기쁨도 말이야.”
엘리오의 아버지가 이별 후의 엘리오에게 했던 말 또한 다르지 않다. 우리는 너무 빨리 떠나고 너무 빨리 돌아온다. 사랑과 여행의 빈자리를 너무 서둘러 채우려 한다. 그래서 소년 시절의 어떤 기억들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느리게 산다.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고통은 고통스런 채로.
열일곱 살의 엘리오는 매년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북서부의 가족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더위를 쫓으려 마을 소년소녀들과 강가에서 수영을 하고 햇살이 따가운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곡 작업을 하는 게 그의 일과다. 옥주와 동주가 보낸 ‘남매의 여름밤’처럼 엘리오에게는 얼마간 따분한 여행의 날들이다.
비슷한 매일은 아버지가 초청한 연구원 올리버의 등장으로 달라진다. 스물 네 살의 미국인 올리버는 욕실을 공유하는, 엘리오의 옆방에 묵는다. 그는 엘리오 가족이 휴가마다 찾는 도시의 사람들과 단 며칠만에 허물없이 어울린다. 엘리오는 그런 올리버를 부러 멀리하거나 퉁명스럽게 대하다가도, 그의 주의를 끌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올리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언어로 말을 걸지만 엘리오에게 가닿지는 못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과 글을 나누며 좀 더 가까워진다. 같이 자전거를 타고 시내의 서점을 향하고 수영을 하며 그 마음이 자신에게만 속해 있지 않다는 걸, 서로를 향한 특별함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안드레 애치먼의 2007년 작 <그해, 여름 손님>이 원작인 영화다. 작가는 *‘지금 주인공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자기 인생에 다시 찾아오지는 않을 테지만, 인생 전체를 바꿀 수도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소설 속 시간은 책이 나온 해로부터 24년 전인 1983년의 여름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소설 속 배경인 이탈리아 리비에라(Riviera)지역의 리구리아(Liguria) 주가 아니라, 북서부 롬바르디아(Lombardy)의 크레마(Crema)라는 작은 도시에서 촬영했다. 실제로 감독이 자랐고 현재 살고 있는 도시다. 그러므로 감독 역시 자신의 소년 시절을 투영해 ‘풍경까지 캐릭터’로 담아낸다.
영화 속 크레마는 푸른 자연의 산과 강 그리고 고풍스런 거리와 고택이 조화롭다. 그 위로 낡은 살구빛 햇살이 비칠 때 관객들은 자연스레 여름날의 격정에 스민다.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풍경이 있듯,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둘의 사랑은 평범한 동성의 사랑이고 그 사랑의 깊이로 인해 특별하다.
그 도시를 비추는 낡은 살구 빛의 햇살은 다름 아닌 엘리오 부모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들은 엘리오의 아버지 펄먼(마이클 스털버그)의 말처럼 ‘이런 일이 없길 바라’는 ‘그런 부모가 아니’다. 그들은 ‘가장 예상치 못할 때 본성은 교활한 방식으로 우리의 약점을 찾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엘리오가 그 시절 사랑에서 느껴야 할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올리버가 여름별장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왔을 때는, 엘리오가 올리버와 둘만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올리버와 엘리오는 둘만의 첫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 될 거라 어렴풋하게 짐작한다. 그러기에 그들의 발자취가 닿는 곳은 온통 나의 이름인 너의 이름을 부르는 메아리로 가득하다.
** ‘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
올리버가 엘리오와 첫 밤을 보내고 난 후 한 말이다. 둘만의 짧은 여행은, 어떤 상실은 슬픔이어서 아름답기도 하다는 걸, 삶이란 그 슬픔을 흐릿한 운명처럼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엘리오에게 말한다. 그럴수록 마음 안의 빈자리는 크다.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절망처럼 다가온다. 엘리오가 그 빈자리를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건, 다시 아버지 버그가 건넨 위로의 말 덕분이다.
“지금은 아무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 평생 느끼지 않고 싶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만들다니. 그보다 더한 낭비가 어디 있니?”
나는 엘리오의 아버지가 엘리오를 빌려 ‘뭔가 나를 막았거나 훼방을 놓’아 결국은 ‘둘 같은 사이는 절대 경험하지 못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 믿는다. 타임슬립의 암호는 그가 젊은 날 느꼈던 사랑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상실의 고통이었으리라. 그러므로 그는 우리들이 잃어버린 ‘여름 방학’을, 그때 우리가 ‘분명히 느꼈던 그것’을 다시금 잃지 말라 당부하고 있다. 그래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엔딩 신은 애잔하며 아름답다.
+ 페이드아웃, 여행이 끝났을 때
올리버의 결혼 소식을 들은 엘리오는 벽난로 앞에 앉는다.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엘리오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뜨겁게 타들어가던 벽난로의 온기는, 아버지의 말처럼 ‘둘 사이에 있었던 것이 얼마나 드물고 특별한 것인지’ 다시금 일깨운다. 엘리오는 눈물을 흘리며 지난 어느 하루를 돌이켜, 올리버가 적어두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문장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강이 흐른다는 의미는 모든 것이 바뀌므로, 두 번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함으로써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강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내 발에 닿았던 강물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다. 사랑이라 말해지는 순간 사랑은 이미 낡기 시작한다. 여행의 시작이 여행의 끝을 향한 첫발인 것처럼. 올리버는 여름별장의 어느 날 왜 이 문장을 다시 옮겨 썼을까? 엘리오는 올리버의 메모를 읽으며 그 의미를 미리 알았을까? 올리버 역시 자신처럼 심장이 뛴다는 걸, 그리고 그 말 속에 이별의 예감이 있다는 걸.
영화는 담담히 슬픔을 마주하는 엘리오의 얼굴 위로 수프얀 스티븐스’의 노래 ‘Visions of Gideon’이 흐르며 끝이 난다.
‘I have loved you for the last time. Is it a viedo? Is it a viedo?’
그것은 이별이었을까? 슬픔을 알아간다는 게 슬픈 일은 아니듯, 이별을 깨달아 사랑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두 번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이별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니 후회가 아닌 ‘미련’은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을 넘어 ***‘내 마음이 가는 그 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여 지는 노랫말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의 여름방학을 사랑한다. 처음 스스로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들로 가득 차던 시간들, 모든 순간이 또렷한 심상을 남기던 그날들을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 낱낱의 여름이 소중한 건 내 모든 사랑과 여행의 발자욱이 그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보낸 옥주와 동주 <남매의 여름밤>이 그러했듯, 올리버와 보낸 엘리오의 여름휴가 역시 그러하다. 햇살이 지난 자리는 온기로 남는다. 그 흔적이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 자리에 있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소년)’를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린 빨리 치유하려고 자신을 너무 많이 망쳐. 그러다가 30살쯤 되면 파산하는 거지.”
그날들이 지나면 모기장 없이 잠들 수 있는 가을이 온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뜨거운 여름보다 쓸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서야 우리는 추억하므로 ‘파산하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다. 그 여름의 온기로 인해 우리는 지금껏 다시 떠나고 또 누군가를 다시 만날 채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상실하고 기억하고 희망하게 되는 것이다.
* 맥스무비의 기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찬란하게 빛낸 26가지 사실들’을 참고했다.
** 서로의 이름을 부른 건 알랙산더스 대옹과 헤스파이스티온의 이야기다. 극중 ost의 노랫말에도 나온다. 오르비에 알프스 샘에서 흘러온 강물처럼.
*** <남매의 여름밤>에서 할아버지가 듣던 장 현의 노래 <미련>의 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