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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19. 2018

그런 날이 다시 올까?

얘기치 못한 일이었다.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공기는 음습하고 엄습했다. 우리는 길을 잃었다. 그렇다고 길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다행히 여름이었다. 얼어 죽을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헤맬 수는 없었지만. 잠시 지도와 나침반(어플이 깔린 스마트폰)을 내렸다. 우리는 습기가 들먹이는 풀밭 위에 드러누웠다. 밤이슬이 등을 적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풀벌레가 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빛이 반짝였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별자리를 장난스레 헤아렸다. 그러다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고 마음대로 별자리를 만들다가, 그는 혼잣말인 양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별을 이야기하기 지겨워 시작한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었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아낸 그의 지난날일 수도 있었다. 



우이도에 들어가는 날이었어. 하늘이 진짜 파랬어. 그날 목포에 와 있던 엄마가 내게 문자를 보냈지.

"아들! 하늘이 너무 아름답다."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한 도시에 있었어. 엄마는 친구들과 여행을 와 있었지. 잠깐 엄마의 문자가 위로가 됐어. ‘아들,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 ‘연애 따위’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 하지만 그건 내 여행과는 무관한 우연이었을 뿐이야. 나는 혼자 견디는 것보다, 혼자인 나를 견딜 수가 없어 떠나왔었지. 그래, 정말 아름다운 하늘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어. 노랗게 벼들이 익어가던 백수해안도로의 가을하늘이었어. 바다보다 푸른 유달산의 하늘이었어. 외남길 성당 앞마당에 누워 나른한 졸음 사이로 맞은 온돌 같은 하늘이었지.

우이도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네 시간이 걸리는 섬이었어.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나는 그 아름다운 섬을 홀로 감당할 자신이 없더라. 아름답다는 게 두려울 수 있구나, 사랑이 두려운 걸 수도 있구나, 싶었지. 그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잃는 게 두려울 수 있다는 걸 안 거야.
우이도에서 사흘을 지냈어. 마지막 밤이었어. 민박집 주인장이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듯 말을 흘렸어.

“오늘 달이 뜰 건데.”

그렇게 말끝을 흐렸지. 어떤 달이 뜬다는 건지, 달이 뜨니 어떻게 하라는 건지 말하지 않았어. ‘달이 떠요’도 아닌 ‘달이 뜰 건데’였어. 자, 나는 보물지도를 주었다. 캐든 말든 그것은 네 몫이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사라졌어.

민박집 이름이 ‘해돋이’였어. 아이러니 하지? 민박집은 선착장을 등지고 언덕 위에 터를 잡고 있었어. 건너편에는 상산봉이 보였지. 나는 얼굴을 씻고 민박집 슬리퍼를 신은 채 들마루에 앉아 있었어. 어둠 속을 바라보며 생각 없이, 말도 없이. 

9시가 넘었나. 동쪽 봉우리가 심상치 않았어. 밤하늘의 능선이 점점 또렷해지는 거야. 마치 산 뒤에서 누가 거대한 랜턴을 비추는 것처럼. 그리고 민박집 주인장의 말처럼 달이 떠올랐지. 거대한 랜턴은 바로 달이었어. 산봉우리 뒤로 조금씩 조금씩 달이 치솟았어. 순식간이었어. 달은 금세 산 위로 떠올랐고 상산봉은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지.

 

달돋이였어. 나는 그제야 달돋이라는 말을 기억해냈지.

제주 사계리에 갔을 때였어.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바다에서 달이 뜬다고 자랑삼아 말했거든. 거짓말인 줄 알았어. 그래서 잊고 있었지. 바로 그 달돋이였어. 본 적 없이 말로만 듣던 풍경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 그런데 울고 있더라. 내가 울고 있더라. 달이 중천에 떠올랐는데 나는 줄곧 소리 없이 울고 있더라. 

위로인 줄 알았던 시간은 실은 내 편이 아니었어. 그래도 잊겠다 다짐했지. 긴 밤이 필요하다면 좁쌀처럼 몸을 움츠려 넋을 놓고 한 번 더 목 놓아 울어주마 다짐했지.

모두 지나간 시간이었으니까. 돌아오지 않을 사랑이니까. 나는 그 사실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대추처럼 쪼그라든 마음의 주름을 펴는 연습을 했어. 마음이 비워졌어. 그것이 무엇이건, 그때 돌아가도 되겠구나, 돌아갈 수 있겠구나, 잊지는 못해도 살아갈 수는 있겠구나 싶었지.

다음날 아침에 휴대폰을 켰어. 세 통의 문자가 와 있었어. 그녀였어.

“어디야?" “어디 있는 거야?”



“내 이야기는 이걸로 끝.”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우리는 조금 더 누워 있었다. 나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곱씹다 너를 떠올렸다. 너와 함께 한 시간을 떠올렸다. 우리가 다시 함께 길 위에 설 수 있을까, 그 길 위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코끝에 맵게 파고들던 홍어 맛에 또 한 번 투덜거릴 수 있을까. 따로 또 같이 걸을 수 있을까. 술에 취해 아낌없이 꺼내놓은 말들에 후회하고, 다시 술에 취해 어제를 잊은 채 바보처럼 낄낄거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다시 나에게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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