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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16. 2018

우리가 우리에게 너그럽던 시간들

하노이에서

하노이 시외터미널에 내리자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터미널 옆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앳된 소녀가 주문을 받으러 나왔다. 소녀는 펜과 메모지 한 장을 들고는 우리 옆에 서서 그냥 웃었다.

“MENU?”

라고 네모를 그리며 말하자 소녀가 다시 웃었다. 우리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소녀에게 어떤 말로 이야기할까 망설이며 손짓과 발짓을 하다 다시 그냥 웃었다. 다시 그녀가 베트남 말로 무어라 말했고 이번에는 우리가 말없이 따라 웃었다.

잠시 후에 쌀국수 두 그릇이 우리 앞에 놓였다. 말없이 후루룩! 후루룩! 그릇은 금세 말끔히 비워졌다. 우리는 계산을 하고 다시 손짓과 발짓과 웃음을 섞어,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정류장을 물었다. 계산을 마친 그녀는 다시 손짓과 발짓과 웃음과 베트남 말을 섞어 대답했다.


젊은 차장이 와서 승차권을 끊는다. 20대 초반의 건들대는 본새의 청년.

“호안끼엠.”

우리는 목적지를 말했다. 그가 근엄한 얼굴로 “오케이”라고 답했다. 버스가 설 때마다 사람들이 오르고 청년은 표를 끊는다. 때때로 경쾌하게 때때로 근엄하게. 권력을 휘두르듯. 버스는 30분 넘게 도시를 달린다. 청년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근엄하고 앳된 얼굴로 말한다.

“next!”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정류장 버스가 멈춰 선다. 우리는 일어선다. 차장이 서둘러 다가온다.

“no! no! next!”

우리는 또 고개를 끄덕이고 기다린다. 다음 정류장에 멈추기 전 그가 우리 앞으로 다시 다가온다. 이번에는 내려도 좋다는 표시다. 여전히 근엄하다. 우리는 말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그의 지시에 따라 내릴 준비를 한다. 그가 우리를 향해 ‘잘했다’는 듯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버스가 떠나고 우리는 마주보며 웃었다. 앳된 근엄함이라니. 나이를 숨기려 부러 잡은 이마 주름으로, 외국인을 대하는 조금은 과장된 책임감으로 성심성의껏 안내하던 그 소년이 귀엽고 고마워서, 구글 맵이 알려준 것보다 한 정거장 더 지나쳤지만 한 정거장만큼 더 즐거웠다.


목적지를 지나쳐도 상관없는 날들, 생각이 생각으로 그쳐도 괜찮은 날들, 버스가 구불구불 도시를 맴돌던 순간들, 거리 곳곳마다 살아 있던 표정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기꺼이 웃을 수 있었던, 우리가 우리에게 너그럽던 시간들, 그날 사진 속 너와 나는 고른 치아를 드러낸 채 바보처럼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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