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굽이굽이 선착장 반대편 고개를 넘는다. 정류장에 내렸을 때 미술관이 보인다. 외관이 흥미롭다. 언덕에 내려앉은 숲 속의 UFO를 닮은 건물이다. 기대를 잔뜩 하고 들어선다. 여기가 미술관이야? 뜻밖이다. 실내는 기둥이 없는 하나의 너른 공간이다. 천장에는 두 개의 둥근 원이 뚫려 있다. 그 위로 햇볕이 들고 낙엽이 떨어진다. SF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무엇보다 미술관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전시 작품이 없다. 나선으로 경사진 벽에는 아무 것도 걸려 있지 않다. 이 또한 UFO의 내부 같다. 뭐지?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간다. 바닥 여기저기에서 물방울 한두 개가 솟아난다. 물방울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중앙으로 흐른다. 하나의 물방울이 다시 다른 바닥에서 솟은 물방을 만나 작은 줄기를 이룬다. 그 줄기가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이번에는 얕은 물웅덩이를 이룬다.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은 그게 전부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지켜야 할 두 가지 규칙이 있다. 누구와도 말을 할 수 없다. 오로지 침묵.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아이들이 떠들면 큐레이터가 다가와 속삭인다. 사람들은 볼 게 없으니 편한 자세로 멍하니 앉아 있다. 가끔씩 자리를 옮기는 사람이 있지만 대체로 고요하다.
나는 적당한 데 자리를 잡는다. 볕이 잘 드는, 막 솟아난 물방울 옆이다. 고개를 드니 열린 천장 위로 하늘이 파랗다. 흰 구름이 둥근 프레임 안으로 느리게 들어왔다가 천천히 흘러나간다. 나는 사람들과 물방울을 헤아리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쳐다보다 그마저 지루해지자 바닥에 몸을 뉘인다. 몸 전체로 고요와 침묵을 만진다. 목적 없는 시간이 익숙해질 때까지 누워 있는다. 간간이 바스락하는 몸짓들이 들린다. 그대로 좋다. 물론 질긴 잡념의 물방울 역시 간간이 솟아난다. 떠나기 전 도시에 두고 온 일상의 걱정이나 그저 그런 여행의 기억이다. 대부분 종잡을 수 없는 망상이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든다.
눈을 떴을 때는 천장으로 스민 햇살이 얼굴까지 번져 있다. 그늘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개의치 않는다. 볕을 쬐며 조금 더 누워 있는다. 내 몸은 ‘밑 빠진 독’이 된 듯하다. 무언가가 채워졌지만 곧 빠져나간다. 몸이 웅하고 울리는 것 같다. 사람들은 물방울과 물방울이 만나 물방울로 흘러가는 표정을, 여전히 넋 놓고 바라본
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잎사귀 몇 개가 또 다른 열린 천장으로 우아하게 내리고 있다.
“좋네.”
나는 큐레이터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한다. 옆자리 사람이 싱긋 웃는다.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네 기분은 알아, 하는 표정이다. 그와 내가 지구라는 베개를 벤 채 같은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긴 잠을 자고 나온 것처럼 몸이 가볍다. 고작 물방울과 하늘과 구름만 보다 나왔는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하다.
미술관을 나와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논길을 걷는다. 길가 자투리땅에는 간이의자를 좌판 삼은 가판대가 놓여 있다. 진열 궤짝에는 주먹 만한 감귤이 가득하다. 주인 없는 자율판매대다. 손으로 쓴 글씨가 정겹다.
‘여름 감귤이 한 개 100엔입니다.’
달다 말다는 말도 없이. 나는 또 “좋네”하고 혼잣말 한다. 그리고는 100엔 동전 하나를 넣고 오렌지처럼 생긴 감귤 하나를 꺼냈다. 귤껍질을 벗길 때는 손끝에서 새콤한 여름 향이 피어난다. 더위가 시큼하게 씻긴다. 가판대의 손 글씨가 한 번 더 인사한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처음 봤는데 ‘언제나’라니. 그런데,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오늘은 무엇이든 그럴 수 있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