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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30. 2022

내 안에도 당신의 사랑이 유전할까?


복사꽃이 한창인 철이다. 복숭아처럼 싱그러운 꽃을 보고 있으면 ‘무릉도원’이 어떤 풍경일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어 좋다. 지난 봄, 사진으로만 보아 넘긴 풍경이 아쉬워 기어이 반곡지를 찾는다. 복사꽃만으로 충분히 무릉도원인데 그곳에는 버드나무가 물가로 신선처럼 가지를 뻗었다. 푸르게 드리우니 내 사는 세상의 시름도 덜어지는 듯하다. 


오늘은 장적하고 봄비까지 내린다. 연못 주위 마을 가득 뽀얀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자그마한 연못가를 거닐며 봄 애상에 젖는다. 가을에는 복숭아 향이 싱긋하게 퍼지겠다. 그때의 무릉은 또 어떤 모습일까. 잔망한 빗방울이 시야를 간섭하건 말건, 이른 봄 더위에 셔츠 하나 걸치고 나온 걸 후회하면서도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해 한동안 머무른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나가는 길가에도 복사꽃이 마중하고 배웅한다. 버스 창가에는 시샘하듯 봄비가 더 거세져 들이친다. 유리에 비친 복사꽃 문양 위로 연신 빗금이 그어진다. 마치 모네의 그림 같아 좋다. 때 마침 버스 라디오에서는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이 흘러나온다.

‘산 넘어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 온다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빗속에서 산 너머 오솔길을 걷는 연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연인이 내 아버지와 엄마의 뒷모습일거라 생각하자 조붓하다는 말이 선명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엄마는 한동안 아버지 전화번호를 아버지 이름 대신 ‘봄이 오는 길’이라고 저장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엄마 휴대폰에는 ‘봄이 오는 길’이 아버지 이름 대신 떴다. 엄마에게 아버지는 ‘봄이 오는 길’이었을까. 그때는 아닐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정이 깊었지만 살갑지 못했다. 가슴으로 느꼈겠지만 표현은 서툴렀다.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아버지를 대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었다. 엄마의 휴대폰에 아버지는 매번 다른 이름으로 적혔다. 엄마는 자신의 바람을 담아 아버지의 애칭을 지었다. 대중가요 제목이거나 기억에 남는 문구이거나 어떤 특징의 단어이거나. ‘봄이 오는 길’ 전에는 ‘왕애물’이었다. 자주 병원을 들락거리는 아버지를 엄마는 그리 불렀다. 그때 엄마에게 아버지는 애물단지였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다. 당신 발로 걸어 병원을 오갈 수 있던 아버지는 엄마에게 아직은 애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시는 시간이 길어지며 ‘애물’은 ‘봄이 오는 길’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병원에 계시는 시간이 길어지며 엄마에게 기대는 마음도 커졌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길게 자리를 비울 때면, 어김없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 있냐고. 빨리 오라고. 엄마 전화기에는 그 말보다 먼저 ‘봄이 오는 길’이라는 글이 떴겠지. 병원으로 가는 엄마의 마음은 ‘봄이 오는 길’이었을까,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봄이 오는 길’ 다음은 ‘하하호호’였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 전화기에서 좀처럼 울리지 않는 아버지 번호는 ‘하하호호’였다. 내가 아버지 병원을 찾아가는 날이면, 엄마는 아버지에게 미리 당부했다. 아들 오면 ‘하하’하고 웃으라고. 내가 병원을 찾을 때 아버지는 늘 첫 인사로 힘써 웃어주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엄마는 내게 말하곤 했다. 아버지 병간호로 보낸 마지막 일 년이 40여년 전쟁 같은 결혼 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어느 날 병원 침대에 아이처럼 누워 있는 아버지가 그리 사랑스러워 보이더란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부터 아버지를 ‘하하호호’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엄마의 말을 믿었다. 사랑이 믿음보다 큰 말일 것 같지만, 때로 ‘믿음’은 사랑을 잉태하는 말이기도 하다. 힘들고 지쳐서 고통스러웠을,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었다는 그날들이 엄마에게는 어떻게 그리 소중한 시간일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면 나는 다시 엄마를 알지 못하겠다.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아지랑이가 속삭이는 봄은 어떤 모습일까. 봄비 내리는 길목에서, 나는 버스를 타고 복사꽃 핀 도로를 지난다. 오늘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아지랑이 속삭이는 봄처럼 들린다. 이곳은 봄인데 엄마가 아버지를 마주한 그곳에도 이제 봄이 왔을까?


‘어차피 찾아오실 고운 손님이기에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노랫말이 오늘은 엄마의 목소리처럼 와 닿는다. 아버지의 이름이 ‘봄이 오는 길’이 되기 이전, 엄마가 내게 찾아달라고 한 노래 목록에는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이 있었다. 그때는 이 노랫말이 엄마의 마음인 걸 몰랐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떠났던 계절도 5월의 활짝 핀 봄이었다. 

차창이 비에 젖는다. 복사꽃이 봄에 젖는다. 이곳은 무릉도원이다. 엄마가 아버지를 다시 만난, 그곳 또한 봄꽃이 가득한 무릉도원이겠지. 엄마는 그 길을 걸어 아버지를 만나러 봄나들이를 떠난 것이겠지. 봄이 오는 길목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자꾸 엄마에게 묻곤 한다. 

내 안에도 엄마의 사랑이 유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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