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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30. 2022

한송이 꽃 곁에 온

Epilogue


눈이 멀어 사방이 멀어지면

귀가 대신 가

세상의 물건을 받아 오리

꽃이 피었다고

어치가 와서 우네

벌떼가 와서 우네

한 송이 꽃 곁에 온

반짝이는 비늘들

소리가 골물처럼 몰리는 곳

한 송이 꽃을 귀로 보네

내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당신의 은밀한 농담들,

소리의 침실들, 그러나

끝이 있는 사랑의 악보들

의자를 꽃 가운데 놓고

내 몸에 수의를 입히듯

나 먼저,

오래 쓴 눈을 감네


문태준 시인의 <한 송이 꽃 곁에 온>이라는 시다. 문태준 시인은 원체 좋아하는 시인이고, 내 방 책장에 늘 꽂혀 있는 시집이니,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은 게 아닐 것이다. 서너 번은 넘겨보았겠지. 오늘 책꽂이에서 이 시집을 다시 꺼내 들었다가 꼼짝없이 붙들리고 말았다. 무심코 손을 뻗어 꺼낸 것이었는데 나는 금세 감상에 젖어 시 한 편을 읽고 또 읽는다. 그 시 속에는 모든 사랑의 시작이 있고 모든 사랑의 끝이 있다. 그리고 새초롬하게 시작한 인생이 막막하게 멀어지는 어느 순간을, 시인은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당신 손을 잡고 영화 속 그 바다에 다녀왔다. 사랑한 사람을 잃게 된다면 꼭 그 바다에 가리라 결심했다. 그때만 해도 그 이별이 어머니의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바다를 당신과 함께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인생은 종종 우리를 알 수 없는 여행으로 안내한다. 그것은 우리의 바람과는 무관해 우리를 상심케 하지만 또 우리의 바람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여행과 사랑에 대해 희망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을 쓰는 동안 엄마는 너무도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떠나고 이 세상은 예상하거나 예감할 수 없는 것 투성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써나간 사랑과 여행에 대한 글들이 쓸모없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처럼 홀연히 떠나기도 하는데. 한참을 슬픔에 젖어 지나고 나니 내게 이유 없었던 지난 이별들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다. 헤어짐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놓아 보내는 마음이었다. 


그 영화 <환상의 빛>의 마지막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버지는 혼자 바다에 있을 때 바다 깊은 곳에 빛이 보인다더군. 그 빛이 반짝거리면서 당신을 유혹하는 것 같다고 해. 누구라도 그런 경험이 있는 거 아닐까?" 

오늘 ‘한 송이 꽃 곁에 온’이라는 시를 읽으며 그날의 바다가 떠오른다. 그날 후로 즐겁거나 기쁘거나 하는 감정이 온전하게 들어차는 날은 없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어깨를 반쯤 펴고 걷는다. 덕분에 엄마가 떠난 자리에 같이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기대어 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요즘은 곁에 있는 그이와 자주 슬픔 바깥을 산책한다.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 외로워질 때도 있지만,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미안하다' 말하고, '고맙다' 말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 더 자주한다. 아무리 늦어도 더디지 않은 고백, 한참을 지나도 그게 사랑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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