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를 읽고
이번 봄 학기 수업 중 수강했던 '민주주의의 미래' 수업의 선정도서였던 '위험한 민주주의(야스차 뭉크 저)'는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공부하는 교과서와 같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민주주의의 위기 신호들을 살펴보고 이 위기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면밀히 분석하는 야스차 뭉크의 연구 자료들은 민주주의의 현 주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다음의 내용들은 본 도서를 읽고 개인적으로 요약한 자료들이며, 꼭 읽어볼 것을 강력히 추천하는 도서다.
위험한 민주주의 PartⅠ자유민주주의의 위기
첫 번째 파트에서 이 책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권리보장 없는 민주주의(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없는 권리보장(비 민주주의적 자유주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을 시작한다. 두 가지 개념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우리가 흔히 그 의미를 혼용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각각의 명확한 개념과 자유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해 설명함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을 오해하지 않도록 해준다.
이 책에서 서술하는 자유민주주의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정치적 시스템으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국민의 뜻을 공공정책으로 변환하는 정치체제이다. 이 단어를 구성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각각 국민의 뜻을 공공정책으로 효과적으로 해석하는, 선거로 구성되는, 일련의 결합된 제도(민주주의) 그리고 법치주의를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모든 시민들에게 언론/종교/출판/결사의 자유와 같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자유주의)이라고 정의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 가지 개념을 명확히 정의내린 것만으로도 독자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의 명확한 개념 설명 부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서술은 바로 37쪽의 ‘온갖 바람직한 것들을 민주주의 개념에 갖다 붙이려는 경향은 민주주의가 가장 정의로운 체제를 위한 용어로 남기를 바라는 철학자들’이라는 문장이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그 명확한 의미를 타인에게 설명할 줄 모른다. 그저 추상적인 단어로서 ‘마냥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 구체적인 부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는 시민이 올바른 민주주의의 개념을 정립하지 못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저자는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감으로서 자유민주주의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를 진단하기 시작한다.
먼저 권리보장 없는 민주주의, 즉 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설명은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서술하며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당선되고 유럽과 남미에서는 점차 극우/극좌 정치인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권을 잡고 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의 근본적 원인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포퓰리스트에 대한 ‘국민의 관점’에 대한 분석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저자는 ‘수백만 명의 유권자들은 트럼프의 단순한 제안을 그의 진실성과 결단력을 알 수 있는 징표로 보았으며, 반면 클린턴의 복잡한 제안은 그녀의 불확실성과 무관심의 표시로 보았다.’라는 분석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분석이다. 현재 세계 경제는 점차 저(低) 성장세에 접어들기 시작했고 단일 민족 중심의 국가 체제에서 다(多)인종 국가 체제로의 변화 추세가 두드러지는 시대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 국민들은 이 복잡하고 힘겨운 시대를 극복할 방법을 정치인이 제시하길 원한다. 그 열망을 기성 정치인들은 엘리트주의에 빠져 효과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실제 이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해결할 방안 자체가 없는 것도 한계다.) 그러나 이 복잡한 문제를 포퓰리스트들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트럼프의 멕시코 장벽, 중국 관세 등)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나아가 이 포퓰리스트의 단순성은 민주주의 제도 하에 국민의 선택으로 선출되었다는 정당성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다. 이 현상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포퓰리스트는 일단 민주적 절차로 권력을 잡은 뒤 언론과 정부 기구를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두고자 ‘개혁’하거나 폐지시킨다. 그리고 나아가 자유주의적 규범을 거스르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까지 한다. 여론을 왜곡시키고 국민적 열망을 무시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주의 없는 권리 보장, 즉 비민주적 자유주의의 체제다. 이 체제를 설명하는 저자는 대표적으로 선출되지 않은 국제기구의 활동과 선출직 기구의 투항을 예로 들었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점차 국가 간 장벽이 무너지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보다 복잡한 국제 문제(가령 기후 변화/국제 무역 등)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국제기구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국제기구의 수장들과 관료들은 ‘시민’의 선택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국민적/시민적 열망에 의해 국제기구의 정책과 규칙이 제정되고 실행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당성 부분의 결여로, 그 국제기구의 정책을 실제 적용받는 시민들에게는 상당히 모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선출직 기구의 무력화 역시 이 비민주적 자유주의 체제가 공고화되는 것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국민의 선택에 의해 선출된 권력은 국민의 지지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재정적 투자가 막대하게 필요하다. 그 재정적 투자는 주로 경제 엘리트와 좁은 이익 범위의 집단의 영향력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다수다. 그리고 점차 선출직 권력들은 자신을 선출한 국민의 뜻이 아닌 소규모 집단의 특수 이익에 맞춰 정책 결정을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현상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그리고 이런 현상의 이면에 있는 국민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저자는 먼저 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현상 속에 민주주의의 정당한 절차와 과정이 진행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분석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포퓰리스트는 과거 독재 정권처럼 무자비한 방식으로 정권을 창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국민의 투표라는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왜 국민이 그들을 선택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문제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다. 비민주적 자유주의는 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호자주의적 제도를 철폐해야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치/경제 엘리트와 특정 이익집단에게 집중되어 있는 결정권과 권력을 국민이 되찾아야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더불어 각 국제기구의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그들 기구 중심적 정책 결정이 아닌 국민적 이익이 반영될 수 있는 결정으로 그 방향성이 수정되고 균형 잡혀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유권자의 투표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더불어 현대 대중들, 특히 청년층의 민주주의 규칙에 대한 존중과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더불어 시민들이 과거에 비해 보다 권위주적 대안에 집중하고 있다는 지표들이 조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시민들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의미에 점차 실망하게 되었는가?’ 이 설명은 두 번째 파트에서 설명될 예정이다.
위험한 민주주의 PartⅡ 위기는 어디서 왔는가?
두 번째 파트는 자유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이하게 된 배경, 즉 그 구체적 원인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는 파트다. 저자는 구체적인 설명에 앞서 대표적으로 세 가지의 ‘범위 조건’을 현 위기의 주된 원인으로 분석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한 세 가지의 원인(범위조건)과 더불어 저자는 언론과 학계의 ‘네 가지 공통된 실수’를 함께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보다 주의 깊게 현(現) 현상을 분석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야스차 뭉크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는 그 원인과 결과가 단일 구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경제/문화/인구/미디어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 구조를 이루는 것이라는 관점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쇠퇴의 원인 분석과 함께 그 결과로 맞이하게 된 가장 위험한 신호로 ‘포퓰리스트’가 득세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강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쇠퇴원인 - ① 소셜 미디어] 기존에는 상위 계층의 독점적 유지가 가능했던 문자/정보 기술은 쿠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하며 그 독점이 해제되었다. 물론 완전한 의미에서의 의사소통의 평등화는 아니지만 인쇄술 개발 이후 인류 문명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였다. 그리고 더 획기적인 의사소통 기술의 발달은 바로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소셜 미디어’의 등장이다. 이 새로운 개념의 매체는 기존에 사회가 가졌던 ‘일대다 의사소통’의 시대에서 ‘다대다 의사소통’ 시대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했다. 이 매체의 발전은 인류에게 양면(兩面)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기존 매체의 ‘문지기’로서의 역할이 명백히 줄어다는 것이다. 기존 방송사가 선별적으로 전달했던 ‘스크린 효과’는 이제 기대하기 어렵다. 정보는 이제 소셜 미디어 안에서 제한 없이 대중에게 전달되고 상호 간에 전달한다. 정보의 생산자가 되기 위한 진입장벽(자본 등) 역시 낮아져 이제 정보 생산자/수신자의 관계가 구별되지 않는 현상도 마주하게 되었다.
기술낙관론자들은 이런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대중에게 힘을 싣는 것이고 자유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핵심 기술로서 자리매김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에 반해 기술 비관론자들은 사용자들이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온통 둘러싸이는 ‘반향실’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특정 주제에 대해 확고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 소셜 미디어 상에서 자신과 완벽히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의 정보를 접하거나 상호 교류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대중 간의 자유로운 소통이라는 강점을 가진 소셜 미디어가 분열을 심화시키는 의사소통의 부재(不在)라는 모순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쇠퇴원인 - ② 경제침체] 미국이 전후 첫 20년 동안 매년 4%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과 대비해 최근 20년 동안은 매년 2% 성장에 그쳤다. 이와 같은 명백한 경제 성장 둔화와 함께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바로 ‘불평등’의 증가세다. 저자가 예시로 든 대표적인 지표가 ‘절대 소득 이동성’으로, 현재 자식 세대의 소득과 부모가 같은 나이 대였을 때의 소득의 비교 지수이다. 이 지수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다.(부모에 비해 자녀의 소득이 낮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 성장 둔화와 함께 불평등의 가속화 현상은 미국 인구 대부분의 생활수준이 정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전후 시대의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대중이 자유민주주의에게 주었던 정당성은 사라지고 비루한 경제 상황과 맞물려 점점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는 기존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불만으로 이어졌고 그 불만은 기성 정치인을 비판하며 득세하는 포퓰리스트의 등장이라는 직접적인 결과를 낳았다.
야스차 뭉크는 이와 같은 경제 현상과 자유민주주의의 쇠퇴 간의 연관성을 분석하며 볼 수 있었던 한 가지 특징을 주목했다. 그것은 바로 단순히 경제 불황을 겪는 빈곤 계층만이 포풀리스트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현재 부유한 집단도 미래의 경제적 기회가 부족한 곳이라면 포퓰리스트를 지지했다. 지역적으로는 실업률이 더 높고, 일자리 증가가 느리고 수익이 더 낮은 곳에서 포퓰리스트에 대한 강한 지지율을 보였다. 즉, 경제 불안은 당장 현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대한 것이라고 다수의 연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 분석해야하는 것은 단순 경제 침체 현상이 아니라 성장 없는 풍요로움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역동성에 주는 영향을 예측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의 쇠퇴 원인 ③ 사람 잡는 정체성] 고대 아테네와 중세까지 민주주의 ‘시민’의 개념은 제한적이었다. 사람들이 통치한다는 민주주의의 본질에서 그 ‘사람’이란 절대 다수가 아닌 특정 신분과 권리를 가진 소수였다. 이후 근대에 들어 시작된 ‘민족주의’는 인종적 동질성에 기반 된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의 성공에 기여했다. 특히 단일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성장의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단일 민족 국가들에 다수의 이민자들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특히 유럽 국민들이 생각하는 단일 민족이라는 안정성에 이민이라는 새로운 변화는 사회적 불안감을 조성했다. 이 불안감은 유럽과 미국에서 진행된 통계적 지표로도 극명하게 나타나는 사실이다. 포퓰리스트는 이런 불안감을 교묘하게 활용한다. 이민자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과 포퓰리스트의 지지율 사이에 높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일반 대중이 얼마나 이민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민에 대한 불안감을 지리적으로 분석했다. 사람들은 보통 한 도시의 이민자 수가 많을수록 이민에 대한 불안감과 불만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다수의 설문조사와 통계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이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표적인 인종주의자로 이민자에 대한 반대 정책을 주장한 사람이다. 이 대통령이 후보인 시절에 가졌던 지역적 지지율을 살펴보면 오히려 이민자의 수가 소수인 캘리포니아의 트리니티 카운티, 뉴욕주 루이스 카운티와 같은 지역에서 지지율이 높았다. 오히려 이민자 수가 다수를 차지하는 시카고, 뉴욕, LA 등지에서는 지지율이 낮았다. 이민자의 수가 다수일수록 이민에 대해 적개심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이 틀린 것이다. 이는 이민에 대한 분노의 크기는 현실에 대한 불만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좌우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이다. 보다 심층적으로 현재 다수의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미래에는 소수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