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유령>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리뷰-
by 이상한 나라의 주민A Dec 22. 2020
이보게, 자네. 나야 나, 스파르타쿠스라고. 죽어도 진즉에 죽은 사람이 왜 여기 있냐고?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산타에게 선물을 받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고. 우리 유령들도 잠시지만 지상으로 외출할 시간을 선물 받지. 구두쇠 스크루지를 보게나, 그에게는 세 명이나 되는 유령이 찾아갔잖아. 아, 딱히 자네가 구두쇠라 찾아온 건 아니니까 안심하게. 내가 자네를 찾아온 건 다른 이유지만 그건 차차 말하도록 하고 우선은 내 얘기를 들어보는 게 어떻겠나.
다들 나를 콜로세움의 검투사로 알고 있지만, 내가 처음부터 검투사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네.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 스파르타쿠스도 사실 진짜 이름이 아니지. 검투사가 되기 전 나는 트리키아의 전사였다네. 근육질의 몸으로 창과 방패를 휘두르는 진짜 전사 말일세. 가끔씩 사람들이 내게 묻더군. 왜 전사라는 작자들이 제대로 된 갑옷 하나 안 걸치고 툭하면 웃통을 까고 다니냐고 말이야. 물어보는 이가 유독 남자밖에 없는 걸 봤을 때 질문에 의도야 뻔하지 않은가. 그래서 깔게 있어서 깠을 뿐이라고 말해줬지. 그때 그 말을 들은 남자들의 부들거리는 표정이란! 이런, 내가 사람이랑 얘기하는 게 오랜만이다 보니 말이 세고 말았군.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로마의 군단장 글라베르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네. 그는 게타족과 함께 맞서 싸우자던 우리와의 약속을 쉬이 져버렸고, 여기에 반발하는 나를 노예로 만들어 버렸어. 기억하게, 이 세상에 힘센 놈 치고 멀쩡한 놈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타인을 착취함으로써 얻는 부산물을 먹고 힘을 기른 괴물들일세.
노예가 된 내가 팔려간 곳은 바티아투스 검투사 양성소였어.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교관이 내게 처음 묻던 말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군. 그는 단호한 말투로 말했어. “네 발밑에 뭐가 있나?” 그러자 다른 검투사가 답했지. “신성한 땅입니다, 교관님. 피와 눈물로 젖은 땅이죠.” 기가 다 차더군. 노예들의 비참한 피가 흐른 모래를 한 순간에 신성한 땅으로 바꾸다니! 심지어 대답을 한 검투사의 눈은 너무 진지해 보였어. 마치 신앙심으로 가득 찬 신자의 눈빛 같았달까. 교관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 그의 마지막 말은 죄수에게 내리는 사형 언도와 같았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고작 세 마디 말에 평생을 전사로 살아온 내 굳건한 영혼이 밑바닥부터 삐걱거리며 붕괴의 조짐을 보이더군. 이후 내가 노예로 전락하는 과정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았어. 롤러코스터가 오르막에 오를 때는 속도도 느리고, 돌아가는 체인이나 도르래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지만 내려가는 건 그전의 과정이 허무할 만큼 빠르고 간단해.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모든 것이 이뤄지는 거야. 아무 의식도, 의미도 없이. 인간의 영혼이 추락하는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라네. ‘나’라는 자아를 쌓아 올리는 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걸 무너뜨리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지. 자네는 폭언을 듣는 정도로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 자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게. 설마 내가 그까지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짠 눈물을 흘렸겠는가. 인간의 영혼을 추락시키는 건 총 세 가지 공정으로 나뉘어 있네. 그중 고작 첫 번째 공정이 끝났을 뿐이야. 두 번째 공정인 채찍질까지 겪는다면 생각이 달라질걸? 살이 터지고, 그 터진 곳을 다시 매질당하는 그 고통이란! 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다 저려오는군. 그전까지는 단어에 불과하던 폭력이 고통이라는 육신을 얻어 내 몸에 현신하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이때 인간에게는 묘한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지지. 스스로 존엄하다고 여기던 믿음들이 얇은 도금처럼 벗겨지고, 헐벗은 존재가 드러나. 오로지 고통에 대한 두려움만이 남아 몸을 오들오들 떠는 짐승이 말이야. 그전에 얼마나 고귀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건,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던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고통과 공포 앞에서는 모두 평등한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니. 그럼에도 이 과정을 기적처럼 버텨내는 사람이 아주 드물게 있기는 해. 마지막 세 번째 과정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공정이지. 바로 희망주기야. 하하, 잘 못 말한 거 아니냐고? 아니, 나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말했다네. 자네가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표류자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게. 눈앞에는 바닷물이 놓여있지. 자네라면 그 물을 마시겠나? 정상적인 상태라면 그러지 않겠지. 바닷물에 함유된 염분이 오히려 탈수 증상을 일으킬 테니까. 하지만 3일 동안 물을 먹지 못한 상태라면 애기가 달라. 자네는 뭔가를 의식할 틈도 없이 바닷물을 마셔버리고 말 거네. 실제로 많은 표류자들이 바닷물 섭취로 인한 탈수현상으로 죽음을 맡이 하지. 과연 그들이 바닷물을 마시면 죽는 걸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 다 알면서도 마실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렇지 않으면 당장 죽을 것 같으니까. 교관이 내게 속삭인 희망도 바닷물과 같았어. 그는 내게 한 가지를 약속하더군. 자신을 따라오기만 하면 날 챔피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야. 그 순간 나는 바닷물을 마셔버리고 말았어.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날 다시 인간으로 느끼게 해 줄 것이 필요했거든.
나는 교관이 말한 대로 검투 시합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어. 적을 상대할 노련함, 관중을 환호하게 하는 장악력까지 나에게는 뭐하나 빠지는 게 없더라고. 관중은 내게 환호하며 이름을 외쳤지.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 여전히 내가 노예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말이야. 나를 다시 정신 차리게 해 준 건 친구의 이 한 마디였어. “정신 차려, 넌 그냥 노예에 불과해. 살과 피로 이루어진 금맥 광산에 불과하다고!” 그의 말이 맞았어. 설령 챔피언이라고 불린다고 해도 노예는 노예에 불과해. 더 이상 주인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줄 수 없는 때가 오면 그는 환대를 베풀던 그 손으로 내 목을 조를 거야.
하하, 내가 너무 암울한 이야기만 한 것 같군.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주게 여기서부터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니. 나는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네. 그리고 얼마간의 숙고 끝에 아주 간단한 답에 이르게 됐지. 그건 바로 모두 죽이는 거였어. 나를 노예로 규정짓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야. 나는 검을 집었네. 그 끝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베어버리기 위해. 그랬더니 지금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무기를 들고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심지어 나를 괴롭히던 교관조차도 말이야. 그 또한 한 명의 고통받은 노예였던 거지. 우리는 그날 주인과 그의 친구들의 목을 모조리 베었다네. 피가 강이 되어 바닥에 흘러넘쳤고, 벽마다 붉은 꽃이 활짝 피었어. 선혈이 낭자한 지옥도 한가운데 서있던 우리는 더 이상 콜로세움에서 피를 흘리던 노예의 얼굴이 아니었네. 우리의 피 대신 로마인들의 피가 흐르게 하겠노라 맹세한 반란군, 지옥에서 올라온 병사와 같았지. 어떤가, 대제국에 맞선 용감한 검투사들의 이야기가.
아직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흠, 이쯤이면 눈치챌 때도 됐을 텐데. 자네의 내면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채찍 소리와 공포에 떠는 영혼의 신음소리에 말이야. 내가 살아있을 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 삶의 형태는 변화했지만 그 본질까지 그러지 못했어. 강자의 약자 착취는 여전하고,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인정받는데 모든 정력을 쏟아붓고 있어. 자네도 잘 생각해 보게. 입시, 스펙 쌓기, 취업에는 목숨을 걸면서 그 외에 자신의 목소리는 모조리 지워버리지 않았나. 그리고 안타깝게도 자네를 목숨 걸게 했던 것은 사명감이나 자아실현이 아닌 낙오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인 것 같군. 거울을 들어 자네의 겁에 질린 눈을 바라보게. 그러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금세 알게 될 테니. 기억하게, 공포를 주인 삼는 건 오로지 노예밖에 없다는 걸. 자네를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네. 나도 한때는 노예였던 적이 있었으니까. 이대로 지금과 같은 삶을 사는 것도 어찌 보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뭐, 자신에게 미안할 수는 있겠지만 검을 들고 일어서는 것 보다야 차라리 그 편이 더 편하지 않겠나.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자네가 속박하는 것들과의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르는 그때를 위해 내 다음 크리스마스에도 자네를 찾아올 것을 약속하네. 만약 그때가 온다면 나도 옆에서 고함 정도는 질러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