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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형 Jun 28. 2020

02. 1막 2장 <나의 얘기>

1막 2장 (1997-2003)


7살 때까지 부산에서 살다가 아버지 사업으로 울산으로 이사했다. 부산에서의 기억보다는 울산에서의 기억이 더 또렷하다. 유치원 때 친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것이 정서에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종범, 구현이란 친구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 초등학교에 가고 나서도 종종 유치원 앨범으로 인사를 전했다. 당시 찍었던 사진 속에 늘 옆에 있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단발머리의 그 꼬맹이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을까. 이제 나와 같은 30대가 되었겠지. 방학 동안 선생님이 써준 엽서를 보고 선생님이 보고 싶어 무작정 유치원으로 뛰어간 적이 있다. 선생님이 두팔 벌려 반겨주셨는데, 당시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성격을 감안하면, 그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엄마를 유치원으로 초대해 같이 샌드위치를 만드는 시간이 있었는데, 바쁜 일을 모두 뒤로 하고 와준 엄마가 좋았다. 사진 속 나는 해맑게 웃고 있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매우 엄하셨고 어머니는 변함없이 천사 같았다. 아버지한테 혼나고 잠에 들 때면 어머니가 늘 달래고 위로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겨울철 따뜻한 스웨터 같은 엄마를 정말 좋아했다. 베이지색이 잘 어울리는 엄마. 그 온기, 향기, 따스함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나의 어머니는 지금도 한결 같으시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두 분 모두 동일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역할분담을 그렇게 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서러워서 아버지를 잠시 원망했으나 지금은 그것이 아님을 안다. 결국 아버지 또한 모든 게 처음이어서 서툴고 어색한,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같이 나이가 드니 연민이 생긴다.


아버지는 내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셨었고 내 알림장에는 늘 아버지가 수기로 제출한 수학 문제들이 가득했다. 학교 쉬는 시간에 풀고 집에 와서 아버지와 함께 풀이했다. 그래서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모르는 문제를 틀리는 것에는 관대하셨지만, 아는 문제를 틀리는 실수에는 유난히 엄격하셨다. 덕분에 나는 수학에 나름 자신 있어했고, 그 자신감으로 수학경시대회에 자원하여 반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기억에 결과는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11살 때 아버지 투자와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좋은 집으로 이사 갔다 (요즘에도 당시 아버지가 어떤 생각과 고민이 있었고, 그걸 어떻게 해결하여 결과물을 만들어 냈는지 과정을 전해 들을 때면 온몸에 전율이 돋는다). 3층 단독주택에 내 방이 처음으로 생겼고, 괜히 누나 방에 들어가서 얼굴 삐쭉 내밀며 한번 보고 나왔었다. 3층까지 계단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께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면 안 되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양면이 있는 아이였다. 부끄러움을 많이 탔지만, 친구들 앞에 나서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초등학교 전 학년 반장, 부반장에 축구부 활동도 했었다. 저학년 때 반장자리는 어른들 입김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은 커서 알았다. 하지만 부끄러움 때문인지, 반장으로서의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이 많이 다그치셨고 이에 더 많이 위축됐었다. 가게가 바쁘면 내려가 카운터를 보기도 했는데, "이 집 아들이니?" 질문에도 쑥스러움을 많이 탔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상대한다는 게 낯설고 두려웠으리라. 아버지께서는 내 숫기를 길러주기 위해 가게 안에서 노래를 시키셨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였던 만화 지구용사 선가드 주제곡을 불렀었는데 "무지개 다리 놓고~" 부분만 기억한다. 그게 도움이 됐을까, 훗날 나는 어디가든 당당하고 부끄럼 없이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자신감 있는 아이로 자랐다. 또, 여느 남학생들처럼 축구와 게임을 좋아했지만, 이 때문에 많이 혼나기도 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고등학생 때 축구에 대한 과한 열정이화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추후 보충하겠다.  


누나가 많이 아팠었고 엄마는 누나와 함께 자주 서울을 왕래했다. 때문에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청 엄하셨기 때문에 늘 긴장하며 초등학교 청소년기를 보냈었다. 그만큼 엄마를 많이 그리워했던 걸로 기억한다. 곱씹어 보면 살면서 이 시기가 가장 후회스럽다. 아픈 누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철없고 미성숙한 존재였다. 서울에서 걸려온 누나의 전화에 차갑게 대응했다. 오히려 그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기 위해 무심하게 대했던 걸까, 그때의 나에게 묻고 싶다. 답을 알지 못하는 나는 늘 괴롭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그때로 돌아가 누나에게 따뜻한 말과 함께 자주 안아주고 싶다. 다행히도 누나는 힘을 내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누나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이 계기로 우리 가족은 더 단단해졌고, 나는 또래보다 더 일찍 철이 들었으며, 성숙해졌다. 여전히 유쾌하고 밝았지만, 조금은 더 진중하고 속깊은 아이로 변모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가장 또렷한 큰 기억은 2002년 월드컵이다. 그다음 해 여름, 축구와 게임밖에 모르던 나는 영국유학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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