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문과 교수님이 쓰신 글에 오래전 영화에 대한 아주 서정적이고도 강렬한 감상이 적혀 있었다. '비정성시'라는 제목의 영화에 대한 것이었는데 남자 주연배우가 나도 아주 좋아하는 배우인 양조위며 그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이야기에 더욱더 보고 싶어 지는 영화다. 오래된 영화인 데다가 상업영화도 아니었기에 짧은 유튜브 클립을 통해서 그 교수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몇 분짜리 클립만을 볼 수 있었다. 실제 영화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듯 하나 이 영화가 찍힌 시대가 80년대인 탓인지 화면의 분위기에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어떠한 80년대의 정서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는 나에게도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사오십대 아저씨들의 시국 걱정이 오가는 식사 자리에 마주 앉은 두 남녀가 서로 눈빛과 손짓으로 이야기하다가 전축이 있는 곳으로 가 '로렐라이'라는 음악을 튼다. 남자 주인공은 말을 할 수 없는 청각 장애인. 작은 종이에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하면서 애틋한 사랑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장면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한 두 배우를 통해 처음 사랑이 싹트는 순간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 같은 것이 마음속에 일어났다. 그리고 양조위가 여자에게 적어주는 자기의 어릴 적 이야기가 또 내 마음을 건드렸다. '어렸을 때 나무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치고 나서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는데 그때는 너무 어려서 슬픈 건지를 몰랐어요. 그냥 즐겁게 뛰어 놀기만 했어요. '
나는 그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고 슬픔에도 절대적인 조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지금 불행한 거야. 이 정도 상황이라면 슬픈 거지'라고 가르쳐 주게 된 것인지. 스스로 어느 순간부터 배우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수많은 슬픔을, 불행을 배워 알고 또 알아 버렸기에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을 아닐지.
나는 슬픔과 불행을 너무 많이 배우고 싶지 않은데.
이미 배운 것이라도 오래 쓰고 익히지 않으면 못하게 되는 것처럼.
나도 그저 그냥 즐겁게 뛰어놀며 이 생을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
p.s 유튜브에 ' A city of Sadness(1989)'라는 제목으로 전편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