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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프맨작가 Jun 19. 2024

대문호 연암 박지원 선생님 공경합니다.

자유로운 영혼 연암 박지원 성생님


박지원 선생님은 얼굴에 힘이 넘치신 인상을 보이시고 신체가 기골이 장대한 장군의 풍채이십니다. 


그러한 연암 선생님은 어려서 불안정한 우울증, 거식증, 불면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우울증을 해결하시려는 노력도 독특합니다. 


저잣거리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였고 그런 경험들에서 세상의 온갖 이야기들을 만나고 기록하게 됩니다. 신분의 틀에 갇히지 않는 진정한 작가정신을 스스로 만들어 가신 셈입니다. 





그 시절 박지원 선생님은 18세 이전에 <광문자전>의 한문 단편 소설을 쓰게 됩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양반보다 더 훌륭한 민초들 백성들에게서 주인공 광문의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광문을 통해서 양반이었던 박지원 선생님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냉정하게 비판하였고 다시 돌아보게 하는 성찰을 갖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신분을 초월하여 세상일에 실사구시 이용후생적인 관심을 두고 글을 쓰신 연암 선생님의 성품은 평생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광문자전>을 쓰게 된 동기에 관하여 작자는 그 서문에서 “광문은 궁한 걸인으로서 그 명성이 실상보다 훨씬 더 컸다. 즉, 실제 모습(실상)은 더럽고 추하여 보잘것없었지만, 그의 성품과 행적으로 나타난 모습(명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원래 세상에서 명성 얻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형벌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물며 도둑질로 명성을 훔치고, 돈으로 산 가짜 명성을 가지고 다툴 일인가.”라 하여, 당시 양반을 사고판 어지러운 세태를 꾸짖었다. 


광문자전 [廣文者傳]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암은 자유로운 방랑 생활을 즐기는 성품이고, 친구들과 깊은 우정과 학문을 교류합니다.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 때 서얼 출신이던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 때),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습니다. 이후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한때 과거 공부에 힘썼습니다. 1760년 조정의 영수이셨던 할아버지 박필균이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기 때문입니다.




28세에 온 집안의 염원을 담아서 과거시험 1차에 장원에 급제하나 2차 시험에서 백지를 냅니다. 그 후 또다시 금강산에 다녀옵니다. 이듬해 이어서 여러 차례 과거시험 (고의로) 낙방하였으나 과연 그가 과거라는 입신 과정에 관심이 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정조대왕 제위 초기, 홍국영의 칼을 피해서 황해도 금천까지 피신을 하게 되어도 그는 일하면서 글을 쓰는 문인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44세 열하에 다녀올 때까지도 박지원의 인생은 그야말로 궁핍하지만 학문과 문인의 삶으로 그의 뜻을 꺾지 않고 그만의 길을 걷습니다. 그 길에서 박지원의 문인들, 학문적 동지들, 제자들이 생겨나고 그들과 함께 북학파를 이루는 길을 걷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의 일생을 요약하는 키워드는 '여행'과 '우정'이었습니다. 


드디어 나이 44세에 청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 연암의 인생 이모작의 기회가 활짝 펼쳐집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 선생님 필생의 대표 작품입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대왕 시절 북학파 박지원 선생님이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1780년 (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축하 사절로 중국의 북경(당시의 연경)과 열하(피서지)에 갔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입니다.  전문가 학자들의 의견을 빌자면 문학적으로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한 번 까딱하여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번 떨어질 것을 


                                 각오한 터이므로, 


                                귓속에 강물 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 데도 


                               걱정이 없어 마치 의자 위에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 


<하룻밤에 아홉 강을 건너다> 중에서









하지만, 박지원 선생님의 열하일기의 유명세는 정조대왕으로부터 문체반정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고 반성문을 쓰라는 임금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이것 또한 이래저래 핑계를 대어 박지원 선생님은 자신의 새로운 문체를 반성하는 글을 정조에게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당대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기존의 시와 부, 문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썼지요. 열하일기를  통해서 자신이 직접 여행한 그 당시 본 장면과 풍경을 그대로 기술하였습니다. 죽은 누나의 행장을 쓸 때는 부덕이나 현모양처임을 강조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어린 시절 자신이 누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 누나의 화장품에 먹물을 타서 장난친 일 등을 기록하였을 만큼 연암 선생님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수필과 각종 글을 발표하였고, 글씨체 역시 기존의 서체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지었습니다.







"우리 선비들은 오직 지금의 평양만 앎으로 기자(箕子: 전설상 기자조선의 시조)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믿지 않는다.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면 그렇게 믿으며 또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면 그걸 믿는다. 


그러나 봉황성이 바로 평양이라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해괴한 말이라며 


나무랄 게다. 그런 사람들은 요동이 원래 조선 땅이며 숙신(肅愼)·예(穢)·맥(貊)·동이(東夷) 등 여러 나라가 다 


위만조선(衛滿朝鮮: 위만 집권기의 고조선)에 예속됐던 것을 알지 못한다. 또 오라(烏刺)·영고탑(寧古塔)·


후춘(後春) 등지가 원래 고구려의 옛 땅인 것을 알지 못한다.



후세 선비들이 이런 경계를 밝히지 못하고 그냥 한사군(漢四郡)을 모두 압록강 이쪽에 몰아넣어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 짜 맞추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안에서 찾는데, 압록강을 패수, 청천강을 패수, 


또는 대동강을 폐수라 한다. 그렇게 되면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든 것이다. 이 무슨 까닭인가. 


평양을 한곳에 묶어 놓고 패수 위치를 앞으로 뒤로 물린 그때그때의 사정에 그 까닭이 있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여진(女眞)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 하면 〈한서 지리지(漢書地理志)〉에 현도와 낙랑은 있으나 진번과 임둔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지음, 김문수 옮김"







열하일기를 통해서 연암 선생님은 문약한 양반을 비판하고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벽돌집, 수레와 수레의 넓은 길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이용후생의 많은 실학자들 중에서도 상업을 장려하는 생각들을 그의 글에 많이 실었습니다. 열하일기 안에 실린 <허생전>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상업 중시의 그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우정으로 똘똘 뭉친 수많은 동지들, 제자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당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정파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는 문하생에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고요. 대표적으로 연암의 제자인 서얼 출신 박제가는 정조대왕의 아끼는 인물로 나랏일을 하였습니다. 






서류(서자)들을 금고하는 것은, 옛날의 법에서 상고해 보건대 그런 법이 없으며, 예률(禮律)에서 상고해 보건대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초에 좀스러운 신하가 기회를 틈타 앙갚음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디 개국했을 때 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1백 년 뒤에 선묘(宣廟)께서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인묘(仁廟) 때에 미쳐서 또 삼조(三曹)에 허통시켰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열성조에서 고치고 변통한 성대한 뜻을 단연코 알 수가 있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의 글에서> 










청나라의 괘종시계, 태엽시계, 자명종, 망원경, 안경 등을 본 뒤로 그는 조선의 수준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청나라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뒤 실력을 양성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옳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당시의 배청의식(排淸意識)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습니다만, 그의 <열하일기>의 초반에 대륙의 조상들의 나라, 고구려, 발해 등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들을 묘사하고 그의 생각을 피력하였습니다.  연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역사인식에서도 자주적이면서 동시에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서 조선의 강대국을 꿈꾸셨던 진정한 개혁가였습니다.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혹자는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라고 했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 말에 봉황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하는 걸로 보아 


‘수나라와 당나라 때 이 나라말을 따라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을 백암성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맞는 얘기 같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당 태종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결시켜 시위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1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해 성을 굳건히 지킴을 가상(嘉賞) 하였다.’


 -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지음, 김문수 옮김 








박지원 선생님은 1803년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1805년(순조 5년) 10월 20일 한성부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69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의 손자인 박규수를 통해서 그의 사상은 개화파로 전수되고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문호 박지원 선생님은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대문장가로 세계 속의 대한민국 오늘날의 우리들을 일깨워 줍니다.    








박지원 선생님의 문장을 공경하고 그분의 자유로운 영혼을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별한 아내와 슬픈 이야기를 남겨 주셨어요. 박지원 선생님의 동갑내기 전주 이씨 아내가 저세상을 간 것이 50이 되어 벼슬길에 처음 들어서 지방 관직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해 평생 고생만 한 아내에게 아내가 읽을 수 있는 한글 편지를 남기지 못한 것이 안타까움을 탄식하셨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한글을 몰랐고, 한문으로만 대문장을 남기셨어요. 만일 이 대문호가 한글로 한 작품이라도 남겼다면 셰익스피어의 영어나 단테의 이태리어가 울고 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고생을 조금 덜만 하니 아내가 저세상으로 간 것을 미안해하셨기에 20수가 아내에게 바


치는 시를 남기셨다고 합니다. 그 시들을 보면 왜 그렇게 그가 재혼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셨는지, 고생만 시킨 아내를 공경하고 사랑하셨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한 침상에서 함께 자던 잠시 헤어졌는데도


천년이나 된 듯.. 


눈이 다하도록 먼 하늘로 돌아간 


구름을 바라보네..


<박지원 선생님의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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