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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프맨작가 Jul 01. 2024

애틋한 호프맨작가창작소설 완결 작품

화초여왕 라우람과 어른 왕자


생애 두 번째 화초를 곁에 둔다. 첫 번째 화초는 고무나무였고 중국의 해외살이 방 한 칸에서 죽어갔다.


그때 죽어간 화초에 얼마나 미안하였는지 다시는 키우지 않겠노라 스스로 다짐하였었다. 


생명체에 죄를 지은 것 같아서 꺼이꺼이 울던 그 아픈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러서, 베트남 시골 일터의 사무실 창가에 라우람 열대 식물을 가져다 놓았다. 


사실 고향으로 돌아간 아내가 억지로 떠맡겨 놓은 녹색생명체였기에 애정을 키워가려고 애쓰는 중이다. 



* 라우람(베트남어: rau răm, 학명: Persicaria odorata 페르시카리아 오도라타[*])은 마디풀과의 열대 식물이다.






















첫날은 우리 둘 다 데면데면 어색하였다. 자기가 무슨 고귀한 귀족의 품계를 가진 여인이라고 새침 떼는 것 같았다. 아니다. 그녀는 너무도 수줍어서 할 말도 못 하고 숨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한 여인에게 물을 길어다 주었다. 너무 많이 주면 안 된다고 들었지만 또 검색을 해보니 물에 잠겨서 행복한 수초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정말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걱정이 많았다. 일단 하루에 한 번씩 물을 주기로 작정한다. 




물을 줄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청초한 물광 피부가 되었다. 잎새들이 파릇파릇 솟아나고 물기 먹은 얼굴이 반짝였다. 윤슬이 잎새마다 차오르는 것을 보니 그녀의 모습이 우아함으로 펄럭이면서 내게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한순간이었다. 그녀는 좀처럼 내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 또한 마음에 상처 같은 빚이 있었다. 책임감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더 깊이 다가서고 싶지 않았다. 




베트남 5,6월의 더위는 불구덩이 같기도 하고 사우나 지붕 안에 있는 것 같다. 한낮의 불쾌지수가 한창일 때, 라우람 그녀를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등 뒤에서 나를 보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게 할 말을 못 하고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사실 라우람은 아내에게 내쳐짐을 당했다고 호소할 수도 있었다. 아내가 고향으로 떠나면서 내게 강제로 맡기게 된 것이다. 아내와 함께 있던 아늑한 집에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으니 집을 잊어버린 셈이다. 그 자리에 바깥바람도 불었고, 태양이 지고 뜨는 것도 볼 수 있었던 전망 좋은 테라스였다. 


그곳을 강제로 퇴출당하고 수년간 지켜오던 자리를 잃어버린 라우람은 새집으로 옮겨온 것을 서글퍼 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 슬픔을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라우람을 며칠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꼭 <어린 왕자>의 유일한 장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창문 밖에 숲을 이룬 수많은 나무들은 모두 친구 나무들이 곁을 지키고 있다. 


라우람은 동족 친구 없이 혼자서 떨어져서 살고 있었던 게다. 그녀의 외로움, 서글픔, 애닲음이 느껴진다. 


그것도 새로운 주인 아니 유일하게 기대여야 하는 무뚝뚝한 남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것이 


참으로 기막힌 변화였을 것이다. <여름나라 화초여왕,라우람과 어른왕자>이렇게 이 이야기의 글 제목을 지어보았다.




내 등에서 라우람의 시선이 천 갈래의 잎사귀로 변해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다시 라우람의 다정한 시선이 나를 격려하는 것 같다. 


엇갈린 감정, 섞이고 혼합된 감정이 라우람과 나의 등에 맴돌고 있다. 


그녀를 더 이상 모른척할 수도 없고 더 이상 무관심할 수도 없다. 


나는 그녀와 연애 감정에 빠진 것 같았다. 


마치 어린 왕자에게 투정하는 장미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주말부부, 격월 부부인 아내가 이번 달 내내 돌아오지 않고 나 혼자 해외살이를 할 때 라우람이 더욱 큰 위로가 된다. 라우람은 말더듬이도 아니고 실어증 환자는 더욱 아니다. 그녀는 아주 고요할 뿐이다.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 사이에 특별한 언어와 대화가 필요할 뿐이다. 




어린 왕자가 다른 점은 나는 어리지도 않고 어른에다 결혼한 처지인지라 누군가를 이성으로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사랑에 빠졌다. 라우람에게 사로잡힌 것은 확실히 사랑의 감정이다. 


그것은 아내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겠다. 라우람을 사랑하는 것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아내에게 이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아니면 돌아온 후에 아니 다시 라우람을 돌려주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어느 날 노랗게 변한 잎새를 발견하였다. 잎새가 갈라져서 생채기가 난 것도 보였다. 


라우람과 이별하고 싶었다. 아픈 라우람을 곁에 둘 수가 없다. 아내에게 책임을 돌려버리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라우람을 곁에 둘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가장 기본적인 책임감인 생명체 수호의 자격을 놓쳐버렸다. 


라우람이 아파하고 있다. 며칠이 또 지나면 잎새들이 모두 누렇게 변해갈 것 같았다.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닌 것 같다. 또다시 화초를 죽일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기 전에 끝내고 싶었다. 


무관심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고, 라우람과 헤어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동거 생활은 끝이 날 것으로 이미 만날 때부터 결정되었다.


이렇게 헤어질 바에야 만나지 않는 것이 날 것인데, 왜 우리는 늘 새로운 존재를 만나야 하는가! 


살아가는데 왜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왜 그렇게 감정 낭비를 하였을까? 라우람은 죄가 없었다. 오로지 나의 욕심이 문제였다. 




라우람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이 부른 사고였다. 


절망의 끝에서 병든 라우람을 돌려보내기로 하였는데, 상황이 급반전 되었다. 




베트남 사람 정원사 할아버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정원사에게 라우람의 병을 진단받았다. 


이 정원사는 정확히 라우람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었다. 


향수병이었다. 집이 그리워 걸려버린 향수병, 수년간 그 자리에서 바라보던 풍경을 빼앗긴 병, 


라우람은 속가슴에 상처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맞은 것 같았다. 


정원사는 치료의 진단을 해낸다. 자연으로 돌아보내자는 것이다. 일터의 여름나무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하나로 입양시키고자 하였다. 아니 사람의 손길이 더 이상 타지 않는 자연으로 돌려보내자고 한다. 


정원사의 먼발치에서 잘 살아남아주면 좋겠다. 그렇게 소리치고 도망 왔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헤어졌다. 때로는 헤어지는 것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정원사에게 맡겨져서 자연으로 돌아갔다. 라우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자연으로 돌아가버렸다. 라우람이 떠나는 날, 나는 어른 왕자가 되어 그녀를 그리워하기 시작하였다.



















며칠이 흐르도록 빗줄기가 끊어지지 않는다. 라우람을 바깥의 정원에 자유롭게 살라고 버린 지 몇 날이 비를 타고 사랑이 흘러간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이 내 마음에 녹지 않는 빗물이 된다. 눈물과 빗물의 어디쯤이다. 



그녀가 놓여있을 정원에 얼굴을 돌려 보기 싫었다. 그녀가 친구들 식물들과 재잘거리는 것도 질투가 난다. 내게 왔었는데, 내가 쫓아버렸으니 할 말도 없는 내가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일까! 




원예사 아저씨에게 잘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며칠째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녀 곁에는 가지도 못했다. 다시는 그쪽으로 발을 옮기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었다. 중년의 무뚝뚝한 사내가 무슨 허영심 같은 자존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게 또 몇 날이 지나가는데 폭우가 계속해서 하늘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그 폭우에 라우람이 염려되었다. 혹시 저 칼 같은 장대비에 찢기지는 않았는지 염려에 내 마음이 아파지기 시작하였다. 혹시 그 아름다운 이파리들이 폭행당하여 상처투성이가 되지는 않았는지 걱정에 내 마음의 상처가 낫지 않는다. 그렇게 라우람 여왕과 어른 왕자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다. 아니, 내가 짝사랑하고 버리고 채이고 그리워하니 혼자 1인 1역 모두 독백연기하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 여름나라의 우기에 무섭게 쏟아지는 빗물에도 흔들리는 이파리들처럼 아파하고 있었던가 보다. 


















아내가 돌아온다. 아내가 라우람을 가져오라고 한다. 아내에게 차마 그녀를 자연으로 돌려보냈다는걸, 아니 책임지기 싫어 자신 없어서 버렸다는 이야기를 못한다. 


아내는 라우람이 잘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고 나의 마음에 돌을 던졌다. 그 돌이 바위가 되어 첨벙거리던 나의 마음의 호수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내가 돌아오는 것은 기쁜 일. 나의 그녀와 30년 결혼기념식 날에 라우람을 다시 가져가는 두근거리는 계획을 세운다.




그날 저녁 무렵 아무도 모르게 라우람에게 다가갔다. 그녀 앞에서 천둥과 번개를 맞은 것처럼 멈추어 버렸다. 쓰러져 있는 그녀의 집에 놀랐다. 급하게 화분을 바로 세웠다. 그녀의 몸통 곳곳에 난 생채기를 보고 통곡한다. 열흘 동안 라우람은 내동댕이쳐진 그곳에서 처참한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넘어져서 깨진 것은 몸이 아픈 것이지만, 사람들에게서 두 번이나 버림받았기에 그녀의 마음도 처절하게 무너져 버렸다.













라우람의 모든 잎새가 노랗게 아니 잿빛으로 변해갔다. 그 주변의 모든 초록 식물들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란 초록 식물들은 번거로운 화분에 갇혀서 자란 라우람과 달리 생명력에 촉촉하였다. 라우람 그녀는 비가 오면 단비를 맞아야 하었는데 쓰러져서 겨우 흙에 섞인 녹슨 물을 얻어마셨다. 화분에서 흙덩이가 떨어져 나와서 몸을 어디에도 지탱해야 할지 몰라 겨우 숨만 헐떡이며 쉬고 있었다. 주변의 큰 나무들에 가려서 그 멋지게 뻗은 팔 다리의 이파리들에 햇살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렇게 팽겨쳐진 라우람, 죽기 직전의 라우람을 끌어안았다. 기숙사의 방으로 비를 맞으면서 뛰어들어가면서 라우람도, 나도 울고 또 울었다. 




방에서 라우람을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꿈을 꾼다.. 라우람과 춤을 추고 있는, 나는 어른이 되어버린 왕자였다. 어린 왕자였을 때, 장미꽃에게 휘둘리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초록색과 노란색이 섞인 드레스를 입고 내 춤을 받아주었다. 그녀는 여왕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절룩거리면서 춤을 추웠다. 둘 다 어색하게 스텝을 맞추지도 못하고 절뚝거린다. 




"당신은 잔인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나를 떼어놓고 가버렸어요." 



그렇게 울먹이면서 불평을 하고 있는 라우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른 왕자는 더 이상 춤을 출 수도 없었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라우람 여왕은 내 두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다. 그녀는 또렷하게 명령하고 있었다. 



"다시는 나를 버리지 말아요. 나의 왕국에서 강제로 이주된 나를 더 이상 함부로 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분양되어 사람들과 살게 된 반려 식물이랍니다.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내 삶이 되었어요. 그렇기에 왕관 같은 이 멋진 화분을 궁전 삼아서 사는 것이 기쁘답니다."




꿈속에서 들은 화초 여왕 라우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깨어났다. 그날은 고향에서 돌아온 격월 부부의 만남이 있는 뜻깊은 하루였다. 결혼기념일 30주년 행사를 기대하고 있는 나의 아내에게 돌아가는 날이다. 나 또한 아내의 손길을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고 잡초처럼 살았던 두 달이 지나갔다. 그 안에 아내 몰래 라우람과 연애를 하였다. 아내에게 어떻게 고백할지 고민하면서 라우람을 두 손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행히도 라우람은 긴급 치료를 받고 수혈을 받아서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녀도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몰랐을까? 내 곁에 두 손으로 감싸여 있던 것에 행복했던 것일까? 라우람의 불길하고도 행복한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아내는 언제나 우아하다. 그녀는 중년이 된 어느 여인보다도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 마녀의 주문이라도 홀린 것일까? 흡혈귀의 피를 받은 여인일까? 동갑내기 아내는 호기심 많은 귀여운 여인이다. 호기심이 그녀를 젊게 만드는 것이라 믿게 된다. 그녀는 바다 건너 고향에서 경험한 일들을 고상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아내는 눈물을 흘릴 지경이다. 거의 두 달 만에 만났는데 남편이 소홀해졌다고 하는 그녀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면, 그녀의 주문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그렇게 달콤하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어느 날부터 그녀의 불꽃놀이 폭죽 같은 얘기 소리가 줄어들었다. 어디를 다시 떠날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이 늘 일터로 가는 나의 마음에 걸렸다. 고향이 다시 그리운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해진다. 


그런 아내에게 선물을 준비하였다. '결혼기념 30주년 축하해' 그렇게 멋지고 폼 나게 글자를 새겨서 포장을 한 라우람을 꺼내들었다. 아내의 탄성에 큰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여왕과 화초의 여왕이 재회한 순간이었다. 아내는 라우람이 눈이 부시게 빛나는 초록 빛깔의 풍성한 머릿결 같은 모습으로 우아한 여왕 같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슬그머니 라우람을 아내 곁에 떼어놓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라우람이 원래 살던 집에 돌아왔고 저 베란다에서 늘 그렇듯 아침 햇살을 공손하게 인사받을 것이다. 반듯하게 내리는 빗물보다 더 깨끗한 목욕물로 날마다 새롭게 샤워를 하게 될 것이다. 베란다의 그 자리에 여왕처럼 우아하게 앉은 라우람에게 던져진 나의 눈빛을 아내가 눈치챈 것 같았다. 길게 허리까지 내려온 머릿결이 고운 라우람에게 보내진 나의 눈길에 아내의 질투가 섞여있는 것 같았다. 라우람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최고의 기념품이라고 생각하는 아내와 나의 시선은 조금 엇갈리고 있었다. 


그렇게 라우람을 아내에게 맡겨두고 일터로 돌아간다. 월요일 새벽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내와 라우람에게 포옹의 시선을 보내고 집을 떠나왔다. 멀고 먼 시골의 일터이기에 주말에나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홀로 남은 아내 곁에 라우람이 함께 있어주어 안심이 되었다. 라우람과 아내는 좋은 친구일 거라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라우람도 행복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함께 있으면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는 것일까? 아내는 전화에다 대놓고 불평을 하기 시작한다. 라우람의 노랗게 물들은 이파리를 뜯어내어도 또 돋아난다고 말하였다. 초록 빛깔의 윤기가 사라진다고 불평을 하였다. 아니, 초록 빛깔보다 노랗게 변한 잎새들이 더 많이 보인다고 말하였다. 라우람의 싱싱함도 윤기도 사라졌다고 불평 같은 걱정거리를 털어놓은 아내는 시샘을 하는 것도 같았다. 


일터에서 불안이 쌓여갔다. 기숙사 방에서 라우람을 끌어안고 자던 그 날밤처럼 또 라우람 여왕, 그녀의 꿈을 꾸었다. 


"당신이 또 나를 버렸군요. 나를 잊어버렸군요."


"당신들은 이리도 저리도 편리한 대로 팽개치고 말았군요."


"좋아요.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버려지는 슬픔을 겪고 싶지 않아요."













눈물이 고인 채로 꿈결처럼 눈을 뜨니까 라우람의 노랗게 변해버린 이파리를 내 손에 쥐고 있었다. 


그날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라우람과 다시 만났다. 아내는 온통 주말부부의 재회에 관심이 있었고, 나 또한 기쁘게 데이트 같은 시간을 일요일까지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베란다에서 외톨이처럼 보이는 라우람의 노랗게 변해버린 이파리들을 힐끗 몇 번씩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나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라우람에게 시샘과 질투를 보낸 것이 맞다.


"당신이 내가 없는 동안 라우람에게 많이 정이 들었나 봐?"


"당신이 내일 일터로 다시 가지고 가세요!"





<충격 반전> 


그렇게 집문을 닫고 일터로 출발하는 나의 손에는 라우람 화초가 안겨 있었다. 그 화초 안에 편지가 담겨 있었다. 그 편지의 겉봉이 몇 개월은 지난 것처럼 낡아있었고, 애써 그 편지를 열고 싶지 않았다. 이파리에 묻혀서 라우람을 안은 채로 기숙사 안으로 살포시 내려놓았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자꾸만 그 편지에 신경이 쓰였다. 라우람의 노랗게 변한 잎새들 때문이었을까 편지 겉봉도 노랗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라우람이 나의 방에 돌아온 것이 기뻤을까? 생각에 설레기도 하였지만, 자꾸만 그 편지 안을 읽고 싶어진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기숙사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 라우람 화초는 모조리 시들어버린 채로 노란 이파리들이 떨구어졌다. 아침만 해도 그 화분에 노란 잎새들이 긴 머리칼처럼 흘러내렸는데 저녁에 헐벗은 줄기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 줄기의 중심에 노랗게 물들은 오래된 편지 봉투만 덩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덜퍼덕 주저앉아 편지글을 잡아당겼다. 라우람의 잎새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흩어졌다. 편지 봉투 안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안에 라우람의 숲이 울창하였다. 그 안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우람을 부여잡고 오랜만에 따뜻한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호수에 앉아서 넋을 잃었다. 그 안의 세상은 아내와 함께 거닐던 호숫가 숲이었지만, 아무리 아내를 불러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라우람들이 넘치도록 숲을 채우고 아름답고 풍성한 잎새들을 치렁치렁 흘러내리고 있는 풍경은 꿈속에 든 것 같았다. 




"당신과 행복하게 살았던 우리에게 이렇게 여름나라의 라우람을 남기게 되네요. 우리가 함께 살았던 30년 결혼생활 행복했어요. 당신은 늘 어린왕자처럼 순수하게 세상 모두를 끌어안고 살았지요. 늘 낭만적인 당신의 여자로 라우람처럼 살아서 기쁘고 즐거웠어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꿈꾸는 것은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이고 그것으로 족합니다. 부디 이제 그만 나를 잊어주세요. 혼자만 살지 말고요. 라우람에게만 매달리지 말아요. 라우람마저 시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신이 외롭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이제 그만 나를 잊어주어요. 시계추처럼 매달리지 말아요."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눈물이 젖은 두 눈을 깜박거렸다. 깨어난 세상에는 아내도 라우람도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여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치니까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살아났다. 그제야 아내가 고향에 돌아간 후 몇 달째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기억을 되살렸다. 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강제 퇴출시켰다. 몇 달 동안 아내가 남긴 라우람을 붙잡고 현실과 꿈의 어딘가를 헤매고 다녔다. 아내는 영영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편지를 처음 열어본 것이 총알이 박히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하였다. 그 심장이 한동안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심장에서 핏물과 눈물을 쏟아내었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지만, 집과 일터에서 반복했던 생활을 계속하지 않으면 아내는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주말부부의 모양새를 유지하면서 아내가 곁에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살았다. 그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라우람에게 모든 핑계를 돌리고 살았다. 라우람마저도 이미 시들어 저세상에 갔는데 그것마저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으로 뒤돌아보면 아내는 나도 라우람도 따뜻하게 돌보고 있었던 그 시절이 행복하였다. 그들이 내 곁에 없고서야 깨닫고서 통곡하게 되었다. 그 통곡의 눈물이 흘러서 강물의 윤슬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시계추도 태엽을 감을 때가 있었다. 그 순간 멈추게 된다. 시간을 재어보고 다시 조정하고 점검하였다. 30년 동안 변함없이 시계추처럼 살아왔다. 이제는 나의 행성에 홀로 선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보라고 한다. 그러다보면 집 나간 아내도 돌아오고 라우람도 다시 초록 빛깔 꿈을 선물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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