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다가 아니고 돈으로 르네상스를 일으킨 메디치가문 이야기
우리 모두 돈을 모으기 위해서 살지요!
돈 없이 살 수 없어요. 반면에 흔한 말로 돈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돈의 가치가 돈 그 종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압니다. 중년이 되니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아 갑니다.
돈에 관한 영화들 많습니다.
한 번의 기회, 한꺼번에 대박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는 있지만, 모두 허황된 것을 믿습니다.
<오션스 일레븐>, <타자>, <수리남>, <나 코스>.. 이런 영화들이 모두 돈으로 한탕주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화재가 되었다. 하지만, 중년이 되니, 한탕주의는 믿지 않게 되고 그런 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런 영화들 대신에 메디치가, 르네상스 탄생과 번영에 대한 다큐멘터리 감상과 관련된 책을 독서하면서 돈이 어떻게 쓰여야 문화가 융성하게 되는지 깨닫게 된답니다.
코시모 디 메디치의 초상화
돈의 힘이 noblesse oblige(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르네상스를 이룬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은행가 가문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15세기, 피렌체는 6만 명의 인구의 소도시였으나,
인류의 역사를 바꾼 천재들의 도시가 된 것은
돈을 수단으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메디치 가문으로 비롯되었습니다.
인문학의 재탄생, 르네상스를 연 시대, 그 시초는 피렌체의
조반니 디 메디치였습니다. 그는 귀족들보다 서민들의 입장에서 부를 기부하고 공유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선각자였습니다.
1418년 조반니가 "치명적인 불행을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막대한 돈을 내놓았습니다.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폐위된 뒤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28,000듀캇(지금의 우리 돈으로 약 5억 5천만 원)의 보석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조반니의 막대한 돈은 써서 그를 석방시켰지요.
그가 메디치 은행의 고객이었다는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 은행의 파산 직전까지 몰아가면서 폐위된 교황을 도왔습니다.
석방된 뒤 만신창이에 빈털터리가 되어 피렌체로 온 교황 요한에게 조반니는 은신처를 제공했고, 다음 해에 그 교황이 죽었을 때는 그를 기념하여 아름다운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기념비는 여전히 세례당에 남아 있습니다. 1419년에는 조반니가 자비로 중요한 빈민 구제도를 짓고 기금을 내놓습니다. 이 건물은 오늘날도 피렌체 고아원 곧 '오르페 달레 델리 이노첸티'로 남아 있습니다.
조반니 디 메디치는 돈의 가치를 바꾼 르네상스 중심 피렌체를 열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투자하여 교황을 구하고 그렇게 파산 직전이었으나 오히려 로마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피렌체와 로마교황의 신뢰와 찬사를 얻어서 은행가로 크게 부를 얻었지요. 결국 그는 그 부를 피렌체를 위해서 나누었습니다. 부가 나누어지니 더 큰 부가 축적되고 그 부를 문화, 예술의 융성과 시민들의 위한 것으로 선순환시켰던 것입니다.
"나는 어제 카레니 별장에 왔다
이곳을 경작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곳에서 나를 경작하고자 왔네"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 디 메디치는 이렇게 이 메모를
1463년 남겼습니다.
코시모가 세운 플라톤 아카데미 피렌체의 건물
코시모는 인류에게 숨겨져 있던 플라톤 전집을 찾아내었습니다. 이들을 소중하게 아끼면서, 동서양의 장서들을 보관하는 이 건물을 아카데미로 만들면서 르네상스의 빛나게 하였다.
그리스어 장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한 빅뱅 시작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비전을 통해 플라톤 아카데미가 이곳에 세워졌습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동서양 장서 수집, 지식을 모으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작은 도시 국가,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활짝 열었고 유럽 전역으로 르네상스 정신을 퍼뜨린 천재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아들, 로렌초 메디치는 주변의 도시국가들에게 포위된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서 단독으로 나폴리 공화국을 들어가 협상하여 피렌체를 구했지요. 그로 인해서 위대한 자의 칭호를 받았지만, 그는 이미 독재자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의 피렌체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또 메디치가의 파멸을 자초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을 이었던 그녀,
'마리아 메디치'는 메디치가의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에 기증합니다.
그렇게 부를 어떻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가!
그녀 덕분에 메디치 가문을 칭송하는 역사를 완성하였습니다. 부는 지식과 문화가 떠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메디치 가문을 증명하였던 것입니다.
인문학은 로마제국의 공화정 말기 키케로에 의해서 처음
"인간다움"의 화두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탁월한 지식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러한 화두를 던지고 르네상스를 연 위대한 시대는 바로 피렌체의 천재들의 시대를 연 14세기, 15세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