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위대한 클로드 모네,불멸의 수련작품

시력을 상실하면서 완성한 위대한 수련 명작품



베토벤은 청력 상실 후 그 위대한 작품들을 창작하였고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





바흐는 시력상실 후 악보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었기에 그의 마지막 작품 푸가는 위대한 미완성이었다.





모네는 시력상실 후 화가의 감각으로 붓을 움직였고 역사상 가장 장대한 스케일의 수련화 연작을 그렸다.



그들은 모두 장애를 딛고 예술로 승화하여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위대한 불후의 명작을 인류의 유산으로 남겼다.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상실한 모네는 사물의 본질보다는 빛을 받은 대상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빛의 반사에 주목하였다.


인상주의 리더 화가의 대표 중에 한 위인, 모네는 사물의 경계가 모호한 느낌으로 자연의 색과 형태는 다채롭게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네의 흐릿한 시력, 한눈에 비친 세상을 한 폭에 담기 위해 캔버스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작가의 시선에 의존하는 인상주의를 관객이 한눈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을 그려내었다.



모네의 말년, 그 작품의 절정, 거대한 수련 연작을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정보를 구해서 공유하여 본다.







Screenshot_2024-07-18_181131.png?type=w966



수련 [ Nymphéas ] 연작 클로드 모네






<호프맨작가의 감상평>


모네의 연작 <수련>은 왜 그렇게 우리를 몰입하게 하는가! 세상에 돌이 모두 같지 않다. 사람들의 시선도 각자 다르다. 수련의 풍경도 시간에 따라서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서 날씨와 계절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그의 걸작품 수련은 각기 다른 명작품들의 시리즈 연작이다. 연작이지만 각각 작품마다 품은 스토리는 다르다. 위대한 스토리가 연결되어 대서사시가 된다. 모네의 수련 연작품들을 사랑하게 된다. 나의 흠모는 다르지만 연결되고 소통하게 하고 몰입되고 만다.





[ Nymphéas ] 연작은 클로드 모네가 1890년대 후반부터 1926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30년 동안 작업한 작품입니다. 이 연작은 그가 노르망디에 있는 지베르니의 자신의 저택에 만든 물 정원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모네가 1922년 프랑스 국가에 기증한 마지막 대형 패널이 탄생했고, 1927년부터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 nymphéa 라는 단어 는 요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numphé에서 유래했으며, 이 이름은 헤라클레스에 대한 사랑으로 죽어가는 요정이 꽃의 탄생을 가져온다는 고전 신화에서 따왔습니다. 사실, 수련을 뜻하는 과학적 용어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수련 연못은 모네가 거의 300점의 그림으로 구성된 거대한 작품을 만드는 데 영감을 주었으며, 그 중 40점 이상이 대형 포맷이었습니다. 또한 님페아스 그림에서 세 개의 직물 작업이 엮여졌는데, 이는 이 시리즈의 장식적 성격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모네에게 감동을 받는 점중에 하나는 시력상실을 딛고, 가족 상실 슬픔을 이겨내고 노년에까지 그의 불꽃같은 창작의 예술가정신이고 숭고한 완성입니다. 그에게 예술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기에 그는 그 불꽃으로 세상을 인상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겁니다.




1914년, 74세의 나이로 아들을 잃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자 모네는 "오래된 시도"에 기반하여 "대규모의 무언가를 시도" 하고 싶다는 새로운 열망을 느꼈습니다. 1909년에 그는 이미 귀스타브 제프루아에게 "벽을 따라 운반되는" 수련의 주제를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나이 60에 이르러 1914년 6월에 그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다"라고 썼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몇 년 동안 그를 사로잡았고 그동안 그는 장애물과 의심에 시달렸지만 한 사람의 우정과 지원이 결정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였습니다. 그들은 1860년에 만났지만 연락이 끊겼고 클레망소가 지베르니 근처 베르누빌에 부동산을 매입한 1908년 이후 다시 만났습니다. 모네는 클레망소 공화당의 생각을 공유했고 우리는 또한 클레망소가 예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모네는 날씨가 좋을 때는 야외에서, 그리고 1916년에 자연광을 받을 수 있는 지붕 창문이 있는 거대한 스튜디오에서 번갈아가며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1918년 11월 12일, 휴전 다음 날, 모네는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승리의 날에 서명하고 싶은 장식 패널 두 개를 완성하려 하고 있으며, 당신이 중개자로서 국가에 제공할 수 있는지 묻고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화가는 국가에 진정한 평화의 기념물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장식 시리즈가 어디에 놓일지 아직 확실하지 않은 당시, 클레망소는 모네에게 이 선물을 두 개의 패널에서 장식 시리즈 전체로 늘리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1920년에 이 선물은 공식화되었고, 9월에 모네와 Musée des Beaux-Arts의 관장인 폴 레옹 사이에 12개의 장식 패널을 국가에 선물하는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레옹은 화가의 지시에 따라 특정 건물에 이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의심에 사로잡힌 모네는 계속해서 패널을 재작업했고 심지어 일부는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EB%AA%A8%EB%84%A4_%EC%88%98%EB%A0%A811.png?type=w966




<호프맨작가의 감상평>


저 다리 위에 올라서고 싶다. 그 위에서 바라본 수련을 손에 쥐고 싶다. 그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모네의 시선은 저 다리 위에 있었지만, 그는 그곳을 올라가지 않고 연꽃을 주인공으로 그렸다. 연꽃의 시선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나는 감히 그 시선의 욕망에서 이 불후의 명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나의 마음에 활활 타오르는 연꽃들이 희망의 찬가를 부른다. 연꽃은 가장 힘겨운 불운마저 행운으로 바꾸는 마법의 열정적인 묘약을 제공한다. 모네에게 수련은 그의 삶의 마지막까지 예술가정신을 지탱하는 불꽃이었다. 우리에게 그 물 위에 떠있는 그 수련들은 사람의 정신을 일깨우는 투사기의 살아있는 환영이다.



1922년 4월 12일에 19개의 패널을 선물하는 계약이 체결되었지만, 모네는 여전히 불만스러워서 작품을 완성할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클레망소는 그해 그에게 "당신은 붓의 힘과 정신으로 이룰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는 편지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네는 1926년에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보관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의 친구 클레망소는 모네의 바람에 따라 수련을 위한 방을 개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전체 세트는 20세기 상반기에 만들어진 회화 작품 중 가장 방대하고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이며, 200m2(2,153제곱피트)의 표면적을 차지합니다. 그림이 덮은 크기와 면적은 거의 100미터(328피트)가 넘는 면적으로 관람객을 감싸며, 수련, 버드나무 가지, 나무와 구름의 반사로 점철된 물의 풍경이 펼쳐지며, 모네가 표현한 대로 "지평선도 해안도 없는 파도의 끝없는 전체의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림과 그 배치는 건물의 방향에서 반향을 일으킵니다. 일출 색조의 장면은 동쪽에, 일몰 색조의 장면은 서쪽에 배치됩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에서 연속체의 표현이 구체화됩니다. 마찬가지로 암시적인 방식으로 방의 타원형 모양은 무한대의 수학적 기호를 끌어냅니다. 오랑 주리 미술관의 수련 그림은 때때로 다양한 사건과 해프닝에 맞서야 했습니다. 특히, 1944년 폭격으로 2번째 방의 지붕과 작품 중 하나가 손상되었지만, 다른 패널은 기적적으로 무사했습니다. 2006년 리노베이션은 수련 방을 원래 상태로 복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모네가 원했던 자연광을 가리는 1960년대 리노베이션 작업으로 인해 사라졌던 원래 상태입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소개 글을 번역,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EB%AA%A8%EB%84%A4_%EC%88%98%EB%A0%A8.png?type=w966




<호프맨작가의 감상평>


모네의 이 작품은 몽환적이다. 그의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주자 중에 한 위대한 화가였기 때문에 선입관이 있었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시력을 거의 상실해가면서 그가 포착할 수 있는 그의 정원의 수련을 이렇게 그려낸 것이다. 정말 생명체에 무한한 사랑의 감명을 주는 화가의 시선이다. 물 위에 피어난 연꽃을 안개꽃이 피어난 그 곁에서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수련은 사랑이고 사랑을 위해서 저렇게 기적처럼 피어난 것이다. 사랑의 결과는 끝까지 피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수련은 그럼에도 끝까지 피어내려고 안갯속을 뚫고 우리 곁에 이 명작품으로 다가왔다.





클로드 모네(1840.11.14 ~ 1926.12.5)는 젊은 시절 인물화의 캐리커처로 인기를 얻어서 여행비를 얻을 정도로 성장한다. 그의 젊은 시절의 이른 성공은 오히려 그의 오랜 침체기의 고통을 가져오게 만든다. 그 고통의 세월, 아무도 알아보지 않았던 세월을 딛고 그는 야외에서 풍경을 그려보라는 동료 화가에게 영감을 받아서 풍경 화가로 전환한다. 그가 발상을 전환하여 풍경 화가로 도전하지 않았다면 모네의 대 위업이 훗날 빛을 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전환 도전 이후 인상주의 화가의 그룹에서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10여 년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지 않고 무명화가로 고통의 세월을 보낸 것이 보상을 받게 된다. 그는 첫 번째 아내와 자식이 죽는 슬픔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그림에 그의 삶을 의지하게 되었던 그의 처절한 노력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다. 《건초더미》를 비롯해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은 대표적인 연작 작품이다. 모네는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잘 표현해낼 수 있었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네의 눈에는 매시간, 매 분, 매초 빛의 변화가 느껴졌다. 때문에 그는 태양이 뜨고 질 때까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하나의 대상을 그렸다. 하루 종일 빛을 직접 보면서 작업하느라 시력이 크게 손상되었다.




1893년 지베르니에 정원을 넓힐 수 있는 대지를 더 구매하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어 수련을 심고, 연못 위로 일본풍의 아치형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연못과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벽화작업에 착수했다. 《수련》연작은 모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이 그림들은 파리의 튈르리 정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지만 그림 그리기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1926년 86세를 일기로 지베르니에서 생을 마감했다.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백과사전 인용)






%EB%AA%A8%EB%84%A4_%EC%88%98%EB%A0%A8_111.png?type=w966




<호프맨 작가의 감상평>


모네는 빛의 예술가였다. 그가 수련을 바라본 것은 새벽부터 일몰이 드리어내린 그 순간까지 온종일 기다린 덕분에 이렇게 명작을 품어낼 수 있었다. 석양에 비친 수련은 이토록 자신을 감추고 해몰이에 묻혀버렸다. 그럼에도 이 명작품은 메시지를 준다. '나를 잊지 말라요'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물 위에 드리운 마지막 햇살이 윤슬이 되어 수련에게 밤의 생명력을 잉태하게 해준 것이다. 모네의 걸작품은 그렇기에 감동이 된다. 한 사람의 위대한 화가는 그림 속에 수많은 언어를 잉태하고 선언하게 된다. 그 해석은 모두 감상자의 몫이지만 모네의 위대함에 호흡을 멈추게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감성 수필> 소박한 산책길에서 꿈꾸는 시인 철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