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 쇼펜하우어
수학과 물리학은 이성이 참여하는 두 가지 이론적 인식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의 객체를 선험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수학은 그렇게 할 때 완전히 순수하지만, 물리학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순수하다. 그래서 물리학의 경우는 이성 외의 다른 인식의 원천에 따라서 결정하기도 한다.
수학은 인간 이성의 역사가 미치는 한 가장 초창기 시대에서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그리스인이라는 경탄할 만한 민족에서 출발해 학문의 안전한 길을 걸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이 단지 자기 자신하고만 관계하는 논리학에서처럼 수학에서도 저 평탄한 길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개척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순수이성 비판 서문>,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석수 옮김
서양의 철학가들이 피타고라스로부터 또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현판에도 수학을 강조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데카르트, 파스칼, 칸트도 수학의 중요성을 인간만의 이성의 인지로서 참여하였다. 칸트는 뉴턴의 발견을 공부하는 것에서 그의 철학을 쌓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칸트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몇 년 전 불교철학 강의에서 동국대학교 원로 교수님의 추천 때문이었다. 서양 철학가 중에서 칸트는 불교에서 표현하자면 깨달은 사람에 속하는 위대한 사람이라는 격찬이었다.
칸트의 철학은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하여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을 고백한다. 그보다 쇼펜하우어, 니체, 사르트르나 비트겐슈타인 등 현대 철학을 연 삶의 철학 창시자들, 20세기 현대 철학의 거인들이 훨씬 더 친밀하였다. 하지만, 칸트철학은 서양 철학의 기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물줄기 시작을 호수에 담아서 바다로 흘려버린 통합의 철학이었음을 알게 된다. 칸트철학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고 통합을 위한 비판, 이성을 건전하게 비판하여 순수이성이 실천이성을 갖도록 설법한 위대한 철학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 철학의 실천이성을 의지라는 것으로 다시 재설정하였다. 쇼펜하우어에게 칸트는 위대한 스승이었다. 인간의 이성을 이렇게 의지로 다시 표현하고 철학 세계관을 설정한 철학가들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철학적 사유를 하고 이를 재구성하여 글로 남긴 철학가들을 공경한다.
쇼펜하우어의 인간은 의지를 통해서 세계를 인지하고 설정할 수 있으면 칸트는 이를 실천이성이라고 하였다. 정말 청출어람이 아닐 수 없다. 위대한 스승의 위대한 제자이다. 하지만 서양철학이 늘 그렇게 발전하였듯, 쇼펜하우어도 스승 칸트를 넘어서기 위해서 그만의 독창적인 철학관으로 현대철학을 열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어받았듯.. 서양철학은 늘 비판에서 새로운 긍정의 비판으로 낳았다.
칸트는 절대 감성, 지성, 이성의 어느 한쪽에 우위를 점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통합을 위한 비판의 용광로였다. 우리는 칸트에게 빚을 졌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이 가진 감성, 지성, 이성의 작용이 얼마나 큰 인간의 차별점이고 위대한 점인지 간과하고 마는 것을 칸트 덕분에 깨우치게 된다. 감성, 지성, 이성을 무시하고 영성으로 바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영성조차 감성, 지성, 이성의 바탕 없이 사상누각이다. 역설적으로 영성에 눈을 뜨지 못하고 감성, 지성, 이성에만 머무르는 사람들도 오묘한 우주의 대서사시를 놓치고 마는 일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서양철학에서 플라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는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물에 답을 하려고 하였다. 그 이전에 플라톤이 만물에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칸트는 그 질문과 답변들을 거대한 용광로에서 녹여내었다. 그 이후의 철학가들은 용광로의 녹는점에서 만들어진 진액들을 주워 담았다.
칸트의 호수 저수지에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의 사상이 모여들었고, 그 호수 저수지를 통해서 다시 근대 현대의 철학가들의 하천이 생겨났다고 하는 평가가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