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의 역사
로마의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서기 72년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1개 층이 증축되었고, 총 4개 층을 갖춘 형태로 82년에 완공된다.
폭군 네로 황제의 자살 이후 세 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69년 공식적으로 황제에 등극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명군으로 평가된다. 그의 두 아들까지 함께 부자의 유산으로 완공한 것인 콜로세움이다.
폭군, 네로의 궁전 단지의 중심이었던 인공 호수는 물이 빠지고 콜로세움이 그곳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비교적 겸손하게 시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전 폭군 황제의 사유 호수를 수만 명의 로마인을 수용할 수 있는 공공 원형극장으로 바꾸기로 한 결정은 로마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콜로세움은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대형 원형 경기장으로, 대리석과 벽돌, 시멘트 등을 사용하여 로마의 첨단 건축 기법이 총동원되었다. 직경의 길이는 긴 쪽 188m, 짧은 쪽 156m이며,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가 48m로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 기둥의 건축 양식이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 식으로 각각 다른 것도 특징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 시내에는 다양한 벽돌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고대 로마의 건축 기술과 전통을 계승하며,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벽돌 건물은 뛰어난 건축 기술과 예술성을 보여주며, 오늘날까지 많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 중 하나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벽돌 건물은 현대 건축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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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콜로세움 영상은 상기 블로그 안에 있습니다.
클라디아토르(검투사)의 시합과 맹수 연기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다.
한편, 로마 정치가들에게 원형경기장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며 때로는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콜로세움 [Colosseum]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원형극장은 약 50,000명의 관객을 수용했으며, 거대한 접이식 벨라리움(천막)으로 햇빛을 차단했다.
로마 제국의 가장 큰 웅장한 상징이 된 이 건물에 Q&A 질문과 답변을 공유해 본다.
Q1 : 콜로세움은 누가 어떻게 건설하였는가?
베스파시오스황제와 아들 황제들 때부터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정복한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약탈한다. 베스파시오스 황제의 아들이 승리를 쟁취한 유대 땅에서 유대인 노예들을 데려와 건설 현장에 투입한다. 로마의 엔지니어들, 장인들이 감독하여 완공하게 된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콜로세움에 절대 방문하지 않게 된 이유들이 된다.
중세 시대에 콜로세움은 교회로 사용되었고, 그다음에는 프랑지파네와 아니발디라는 두 저명한 로마 가문이 요새로 사용했다. 콜로세움은 번개와 지진으로 손상되었고, 더 심각하게는 파괴 행위와 오염으로 손상되었다. 모든 대리석 좌석과 장식 재료는 사라졌고, 이 장소는 1,000년 이상 채석장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Q2. 콜로세움의 아치는 몇 개인가?
각 층마다 80개의 아치가 있었다. 지금은 31개의 아치만 남아있다.
로마 제국 건축의 위대함과 고상함은 바로 이 아치를 활용한 구조적 미학적 역할이다.
구조적 역할로서 아치 구조는 수평 힘을 수직 힘으로 변환시켜 지지력을 확보하고 건물의 무게를 분산시켜 안정성을 높여준다. 미학적 역할로서 곡선의 우아한 형태는 건축물에 우아하고 고상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이로써 건축물의 외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콜로세움은 매년 700만 명의 방문객이 찾아온다. 시월 중순의 로마는 모든 관광지마다 관광객으로 붐볐지만, 특히 콜로세움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그렇게 덥지 않은 지난 10월의 날씨가 도보여행객의 큰 지원군이 되었다. 그늘 아래 위주로 다니는 것이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요령이고, 시월에도 로마의 햇빛을 강렬하고 뜨거웠다. 저 콜로세움에서 살인적인 공연을 해야 하였던 사람들은 얼마나 더 뜨거운 햇살을 견뎌내야 하였을까?
Q3 : 콜로세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죽었는가?
콜로세움에서 약 350년간 40만 명의 사람들 - 검투사, 노예, 죄수, 기독교인 등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사자, 호랑이, 늑대, 곰, 표범, 멧돼지, 코끼리, 하이에나, 버펄로, 하마, 악어, 기린 등의 동물들이 수백만 마리가 죽어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많은 죽음들이 콜로세움의 역사에 있었기에 방문객들은 그 어두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거대한 원형경기장은 잠실 야구장의 2배 규모, 한일 월드컵의 무대, 아시아 최대 축구장인 상암 구장의 규모와 비교해도 비슷한 규모이다. 그 압도적인 규모의 크기에 놀라고, 그 석조 건물의 세련됨과 정교함에 또 놀란다. 지하 궁전과 같은 미로에 수많은 검투사들, 죄수들, 노예들, 동물들이 있었던 공간을 내려다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국민들의 오락거리가 이렇게 잔인해도 되는 것인가? 인간의 본성을 헤아리고 만족시키려는 로마의 황제들의 정치적 전략이 보이는 공간이다.
기록에 의하면 어떤 황제는 하루에 십여 차례의 서커스나 검투 경기를 원형극장에서 관람한 기록도 있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의 번영을 잘 다스리는 것에 관심이 없고, 로마의 멸망으로 가게 한, 안으로 골병드는 오락거리들에 빠져있던 황제나 귀족들에게 콜로세움은 동시에 어두운 로마 제국의 그늘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로마 제국의 명군들, 현제들, 철학적 사유를 깊게 한 철학가 황제들은 원형경기장에 흥미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황제는 109년에 100여 일 동안 약 1만여 명의 검투사를 대결에 투입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제와 귀족들이 관람했을 VIP 좌석이 보이고 그 아래 펼쳐진 공연장 밑의 지하가 미로처럼 울퉁불퉁하게 드러난다. 웅장한 관람석보다 그 지하에 자꾸 눈길이 쏠리는 것은 그들의 살과 피가 관람객들 - 로마의 시민들에게 흥겨움을 주었을, 역설적인 제국의 오락거리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한숨을 쥐어보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이렇게 피를 보아야 하는 짐승 같은 것인가?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그러한 야수적인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려고 무료 300여 년 동안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을 활용하였다.
오늘날 전쟁, 전투, 잔인한 게임에 극도로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AI 기술이다. 21세기의 콜로세움은 개인의 선택에 따라서 여전히 온라인, 영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콜로세움 게임부터 오징어게임으로 변형된 콜로세움, 2025년도 개봉하는 글레디에이터 2, 고전 영화 벤허의 원형경기장... 이들 모두 로마제국의 원형경기장의 후예들이다. 로마제국은 이 원형경기장으로 시민들을 흥분, 마비시키면서 제국의 오락거리로 흥한 것 같았다. 동시에 점점 더 마약처럼 서서히 잔혹한 문화로 전락하면서 로마제국은 쇠락한 것임을 교훈 삼아야 하겠다.
Q4 :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관련이 있었는가?
유대인들의 노예가 작업자들이 되어 건설한 콜로세움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순교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아니다? 양분된 의견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교황이 콜로세움은 중요한 기독교의 유적으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걸려있다.
교황 성 비오(1566-72)는 유물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모래를 구해오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교황은 콜로세움 경기장이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교황의 의견은 그의 동시대 사람들과 공유되지 않은 듯하다. 실용적인 식스토 5세(1585-90)는 죽음으로 인해 콜로세움을 모직물 공장으로 바꾸는 것을 막았다. 그 뒤로도 후대 교황들에 의해서 콜로세움이 더 이상 파괴되는 것을 막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Q5 : 로마의 콜로세움의 역사는?
지난 2천여 년간 3번의 화재, 4번의 지진, 묘지, 예배 장소, 주택, 장인들의 작업장, 종교단체의 본거지 및
요새 등으로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콜로세움은 로마의 영광스러운 과거의 상징으로 재발견되었다. 예술가, 작가, 지식인들이 고대 원형 경기장의 웅장함과 복잡한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세기에 가톨릭교회는 전통에 따라 콜로세움을 성지로 지정하여 이곳에서 순교한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원형경기장 내부에 십자가의 길(Via Crucis)이 건설되어 예배와 추모의 장소로 바뀌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 콜로세움은 그 구조와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여러 복원 프로젝트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보존 노력이 계속되어 콜로세움은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 웅장함과 매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콜로세움은 로마 제국의 제정시대의 번영과 쇠락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적인 건물이다. 그 거대한 건축물 안에 인류의 야수적인 본성과 영성을 동시에 담고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들이 많다. 로마 제국은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듯, 로마 제국의 쇠락과 멸망도 하루 저녁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문화가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이 되었을 때, 제국의 시민들에게 제국의 군인들에게 보편적인 성숙함으로 만족하게 다스려졌을 때 지켜져야 했다. 높은 제국의 이상을 지키지 못하였던 로마 제국이 무너진 것은 제국의 내부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