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답사 인문학 여행기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은 250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 1위의 역사 유적지 최고 중의 하나이다. 유네스코 로고 상징의 유적지이니까... 아테네 관광 첫 번째 중요한 코스, 무조건 가야만 하는 유적지는 아크로폴리스다. 그곳에 두발이 올라가는 언덕길, 계단길, 거대한 대리석 성문을을 통과하는 동안 두근두근하였다.
기원전부터 21세기 오늘날까지 이렇게 잘 보존된 대형 유적지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 이유들은 아네테 아크로폴리스, 2500년의 유적지가 우리들 곁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들, 역사와 영웅들, 인문학과 예술정신이 함께 호흡하고 있는 이 언덕 위는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아쉬운 점은 중국 대륙에 있는 우리나라의 기원전 유적지들이 이렇게 보존되어 남아있고 세계인들에게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하게도 된다.
아크로폴리스의 두 번째 신전인 니케 신전이다. 아테네신과 포세이돈신이 아테네인들에게 수호신을 정하라고 했던 신화가 가득한 신전이다. 포세이돈 신은 샘물을, 아테네신은 올리브나무를 선물하면서 아테네인들에게 수호신을 정하라고 하였다. 아테네인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올리브나무를 선물로 받으면서 세계 최대의 올리브 산지, 수출국으로 해상무역의 주요 교역 품목을 갖게 되었다.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신은 오디세우스가 이타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큰 도움을 주고, 그의 자식 텔레마코스와 아내, 페넬로페를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남서단, 니케 피르고스에 있는 이오니아식 소신전. 5.4X8.3m. 고대에는 니케 아프테로스(Nike Apteros, 날개없는 니케) 신전이라고도 불렀으나, 니케 신전이 아니고 여신 아테나 신전이다. 완전히 붕괴된 것을 19세기 그리스 독립 후, 처음의 재료를 사용해서 복원했다. 전면, 배면 모두 4주의 전주식. 설계자는 카리클라테스로 추측되며, 완성은 니키아스의 강화(講和, B.C. 421년) 이후로 보이나, 원주 등은 옛 것으로 보인다. 신전의 삼면, 보루의 부조가 유명함.
[네이버 지식백과] 아테나 니케신전 [Athena Nike]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아크로폴리스의 입구다. 계단 하나하나 언덕을 올라가면서 만나는 거대한 대리석들의 기둥들이
SF영화에 나오는 꼭 웅장한 포털을 뚫고 2500년 전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입구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은 흥분과 설렘에 콩닥콩닥 심장 소리를 듣게 된다.
아테나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정의와 지식, 지혜, 지성, 이지(理知), 평화, 전쟁, 전술, 전략, 무력, 도기, 요리, 문명, 공예, 예술, 학문, 기술, 영감, 법, 산업, 수공업, 용기, 수학의 신이자 정의감이 투철한 전사와 영웅, 명예, 영광의 신이다.
아테네는 현재도 그리스의 제1도시이자 수도이고,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였던 아테네의 수호신이다.
그녀의 신전으로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아테나 문화는 사람들이 아테나를 아테네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있었던 신화가 여러 시대를 넘어 다시 기록되는 것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아테나를 이집트인들의 고대 왕조 이전 시대부터 존재했던 리비아의 전쟁의 신이자 여성 사냥꾼 신인 네이트에서 왔다고 여기었다. 아테나는 또한 철학적인 지혜의 여신으로 알려지게 되어 5세기 후와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적용되었다.
위대한 페리클레스를 이 위대한 건축물, 파르테논을 감상할 때마다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네테는 결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전쟁 중 크세르 크세스 왕은 아테네 도시를 무참하게 파괴하였다. 전쟁 종결 후 페리클래스는 아네테의 아크로폴리스의 상징성과 아테네 여신에 대한 신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테네 발전에 초석이라고 믿었다.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 전체의 해상무역 패권의 힘을 가진 것과 더불어 문화, 예술, 철학의 도시로서 자긍심을 갖고, 방문자 모두에게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그의 30년 집권기 동안 민주주의 아테네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동시에 그에 관한 많은 일화들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들이 많았다. 큰 영감을 주는 두 가지를 떠올리면서 아래 공유한다.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라는 철학과 지성이 가득한 여성과 동거하였다.
그가 당시의 기녀와 같았던 출신의 여성, 아스파시아와 동거하는 것도 그 당시 파격적이었지만,
페리클레스는 그녀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의지를 하였다.
심지어 아스파시아를 그가 건설하고 있는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건축물 앞에 데려온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제한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 외국인, 노예들, 특히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없었고, 여성들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하대하였다. 그럼에도 아스파시아를 신전에까지 데려와서 그녀의 감상을 경청한
페리클레스는 남녀 차별 철폐를 몸소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였다.
아스파시아는 소크라테스 등 많은 철학가들에게 소개되었고, 페리클레스는 그의 아내를 많은 남자들에게
소개하고 독립적인 지적 생활을 하도록 양보하였다. 이 또한 여성을 다른 남성들에게 공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페리클레스는 시대를 초월하는 넓은(?) 아량이었다.
아네테 민주주의와 페리클레스는 떼어낼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의 모범적인 리더로 페리클레스를 꼽을 수밖에 없다. 페리클레스는 30년간 아테네의 10인 지도자에 선출되었다. 민주적인 절차로 무료 30년간 국가 지도자에 올라섰으니 그의 권력은 시민들이 공고히 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절차와 국가 경영 시스템을 장려하였다. 심지어 정치 지도자들을 추방시켰던 도편추방제를 지켜내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 또한 어려운 정치 현안들에 직면하고 반대파, 특히 시민들의 반발에 큰 압력을 받았던 시기들도 많았다. 그가 전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그의 역량의 한계도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오늘날 권력자들처럼 보안요원들에 방탄차를 타고 아테네를 걸어 다니지 못하였다.
노출된 채로 보안요원 한 명 없이 민회 정치의 중심에서 매일 일을 하고 저녁에 집으로 퇴근하였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시민들이 그에게 비판을 하였다. 욕지거리에 가까운 시민들의 비판에도 페리클레스는 묵묵부답으로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을 설득하는 뛰어난 수사학의 연설가였고 그렇게 아테네 시민들의 지지를 모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에게 반대하는 시민들의 쓴소리를 기꺼이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그였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의 시스템 위에서 대중을 결집하고 30년간 일인 독재로 아테네를 번영시켰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좋은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 좋은 지도자는 필수다.
민주정은 시민 대중의 정치다. 하지만 그런 정체도 다수의 역량을 모아 공동선을 이뤄내는 정치가의 능력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정도 다르지 않았다. 시민의 의견 결집에 뛰어나야 훌륭한 정치가였고, 페리클레스는 그런 일을 가장 잘한 정치가였다. 그 시대의 정치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평가가 이를 증언한다. “이름은 민주정이지만, 실제로는 제일인자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페리클레스가 전염병으로 죽은 후에, 아테네는 쇠락으로 접어든다. 민주주의도 소위 우중 정치로 우매한 민중을 우매한 정치가들이 선동하였기에 아테네의 패권을 몰락하게 된다. 그는 아테네를 떠났지만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은 수많은 전쟁의 포화에서도 살아남았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상황과 대비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의 쓸모다.
우리나라에 페리클레스 같은 지도자가 출현하지 못할까! 아직 때가 이른 것인가!
아크로폴리스의 입구에서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의 번영과 괴락을 동시에 만난다.
역사 유적지를 만나는 것은 한 시대의 역사가 명멸하는 것을 만나는 일이다.
아네테 여신상이 저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을 채우고 건물 꼭대기에 이르렀던 그 시대의
아테네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역사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 유적지를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확산되고 있다.
19세기, 20세기 초까지도 아테네는 오스만튀르크, 베네치아 등 수많은 외세에 시달리면서도 그리스 독립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한때 적국은 파르테논 신전에 폭약 저장하고 탄약 창고로도 활용하였다 폭격되었던 역사가 있다. 인류의 유산, 파르테논 신전을 계속해서 복원하는 것이 그리스인들, 세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지 우리 모두 공감하게 된다.
<지난해 가을에 다녀온 체험담을 글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