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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vs 빅터 프랭클 삶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서, 허망하게 삶을 허비한 '이반 일리치'는 끝내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 앞에 놓인 건강의 문제를 방치하고 삶이 무너지는 것을 모르고 죽어갔다. 어이없는 죽음이 되었다. 죽음을 예방할 수 있었는데, 사회적 성공과 부를 위한 일에 몰두하였다. 심지어 사랑했던 가족마저 등한시하면서 이반 일리치는 스스로 죽음에 이르러서야 후회하였다. 그는 누군가에 의하여 강제로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것이 아니었다. 자신 스스로 만든 죽음으로 가는 수용소에 묻혀갔다. 그것도 모른 채 병마에 참을 수 없었던 육체의 고통에 신음하게 되면서 그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죽음은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포기하고 좌초된 것이다. 끝내 죽음 직전에서야 그의 삶이 잘못되고 용서를 구해야 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진정한 삶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되었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이반 일리치와 전혀 다른 삶을 긍정한 작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은 달랐다.


2차 세계대전 유태인으로서 4차례나 나치의 수용소에서 옮겨 다니면서 살아남은 저자의 생존기와 로고테라피의 의미를 설명하는 책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는 죽음 직전, 죽어가는 사람들의 체험에서 나온 감명적인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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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은 죽음을 목도하고 죽음 곁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 사투하였다ㅡ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는 가족을 그리워하였고,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였다. 강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면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사투를 벌였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한 그 자신의 신념과 결행이었다. 바로 옆에서 매일 죽어가는 지인들, 친구들, 구타와 같은 극한의 고통, 인육까지 먹었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 하였던 참기 어려운 배고품,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는 시련에서 빅터 프랭클은 살아남았다. 무엇 때문에 살아남았을까? 여기 책의 문장에서 답변이 있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려면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이 글에서 숨을 멈추고 "내가 왜 살아야만 하는지" 다시 한번 깊은 사색과 확신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오면서, 삶에 회의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지 사람들을 치유하게 된다.




정신력과 희망을 가진 사람,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만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행운도 따른 것을 안다. 지인의 도움도 있었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린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비극의 낙관>을 누구보다도 잘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은 시련, 죄, 죽음에 관한 그의 극복을 위한 우리 모두에게 향하는 조언이다.




"시련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중략>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죄에 대한 것 중에서 빅터 프랭클이 교도소의 수감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이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고 죄인이 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죄를 털고 일어나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성장하고,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그 죄를 극복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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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것 이는 곧 삶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삶의 순간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은 끊임없이 죽어 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일회성을 깨닫고 삶의 각 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고" 하였다.




그가 2500명이 모두 굶게 된 벌을 받은 그날,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동료 수감자들에게 해준 이야기는 감동이다.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시련을 겪고 있는 우리들, 적어도 수용소에 갇혀 있지 않은 우리들에게 다음의 스피치는 삶을 뜨겁게 긍정하게 하고 열심히 살아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처지는 그렇게 최악이 아니다.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 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중략)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각 개인에게 얼마나 엄청난 기회가,


그것도 아주 갑자기 찾아오는지.. (중략)


수감자들에게 행운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이었다.







미래에 대하서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미래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과거에 대하어도 얘기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이때 시를 인용했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삶은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열심히 살 이유가 없다. 그만큼 살아가는 것에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 삶의 대의를 세우게 된다. 한일 독립운동의 시기에 독립을 위해서 삶의 대의에 목숨을 바쳤던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나라는 광복될 수 있었다.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의 개인주의 시대에도, 나라를 위해서 걱정하는 수많은 합리적인 사고의 한국인들이 분연히 일어나는 것도 삶의 의미에 '우리 나라의 희망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대한민국의 희망과 국운'을 다시 만들 것이다. 자신의 꿈이 '삶의 의미'가 되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의 경우, 책을 읽고 사유하며 글을 쓰는 것, 작가로서 여생을 살기로 작정한 것이 '삶의 가치이고 의미'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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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에밀 프랭클(Victor Emil Frankl, 1905~1997)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신경학자이며 심리학자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였으며,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츠, 카우퍼링과 투르크맨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빅토르 프랭클은 로고테라피 창시자이며, 오스트리아 정신요법 제3학파인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저서인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1959년에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백과사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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