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배우고 말을 조심하는 삶의 가르침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오해로 인하여 철학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하였습니다.
언어로서 철학의 문제를 해결한 철인 비트겐슈타인의 어록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기존의 철학에서 적용하는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데요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500여년간 이어진 철학의 논쟁들 철학의 각주들이 모두 허망한 언어의 오류란 말인가?
이런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교로 말하면 선문선답과 같은 이야기가 되지요.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고 그의 삶을 공감하면서 그의 철학적 논고가 언어의 말장난이 아님에 감명을 받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최고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막대한 유산상속을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재산을 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수행자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전쟁터 한가운데, 수용소에서 철학서적을 집필한 그의 삶이 곧 감명 깊은 철학이었습니다.
“
"이 책은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에는, 이러한 문제들의 문제 제기가 우리의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뜻은 대략 다음의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 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나는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중에서> 인용
불교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언어, 말에도 사로잡히지 말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야할 가르침을 만납니다.
동시에 좋은 소리를 듣고 좋은 말을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역설적으로 들리는 2500여년의 시공간 차이에서 오는 두 가르침에서 말과 언어에 대하여 얼마나 두렵고 조심스럽게 다가서야 하는지 배웁니다.
법문을 외우는 스님들을 보았던 어린 시절, 그 내용도 모르거니와 왜 한자로 된 법문을 암송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던 사찰에서 들리는 목탁소리와 염불의 소리들의 모두 지금은 아득합니다. 그 아득한 기억들이 중년이 되어서까지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좋은 가르침을 암송하는 수행자들의 노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좋은 말이 좋은 소리로 스스로를 바꾸고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용하는 언어, 글에 적는 언어, 생각하는 언어, 들리는 언어, 말하는 언어들 모두가 나를 이루는 겁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언어도 가르침을 실천하는 언어도 모두 나의 삶을 다스리고 성장시키게 됩니다.
2500년 전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 말로 전해진 것이요, 부처님 열반 후 100년이 지나서야 경전으로 엮어져서 책이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사후 수십 년이 흐른 후에야 신약경전이 엮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언어는 말을 통해 먼저 전승되고 그것이 진실의 힘을 얻어 세상 사람들을 감화시킨 후에 경전으로 엮여서 책 속의 글로 기록되는 겁니다.
그 과정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글 쓰는 작가의 소명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언어를 소중하게 다루고 말과 글의 힘을 믿고 갈고닦도록 하겠습니다.
태국의 사원에서 호프맨작가가 직접 촬영한 부처님 고행의 모습
말과 언어 글의 집착을 경계하시면서, 법문의 소중함을 40년간 설법하신 부처님의 두 모습..
'고행의 모습과 편안하신 모습'에서 말과 언어, 글의 두 양면성을 깨닫게 됩니다.
날카로운 칼날같은 말과 언어, 글도 있지만, 세상을 포근하게 감싸는 지점도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의 논고는 불교의 선문선답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말로서 말없음의 세계를 규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태국 사원에서 촬영한 부처님 조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