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공부의 이유는?
사람은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필멸의 존재입니다.
시시각각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겁니다.
쉬렌 키르케고르는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철학서적을 통해서 절망의 철학을 논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놓아 필멸의 존재를 한탄만 하고 있을까요?
인류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언제나 죽음을 뛰어넘는 상상과 해방의 사유를 하였습니다.
사실 키르케고르는 <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절망의 원인은 육신보다 '영혼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혼을 채우려는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하나, 이 세상이 아니고, 저세상을 위하여 종교에 광신적으로 의존하는 길
종교인들 중에서 맹신적인 신앙이 아니고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모두에게 모범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는 분들 중에 오히려 광신이 아니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홀로 기도를 올리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여 광신적으로 종교에 구원을 청하는 경우, 이생의 삶은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중세 시대 교황이 면죄부를 팔았던 그런 종교생활이 강제되는 상황과 유사한 상태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삶을 제대로 올바르게 살아가는데 악영향이 있겠지요.
무슨 법사 등이 정치권에 영향을 주고 미신과 미혹에 빠져들게 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한숨짓게 됩니다. 결국 그런 위정자들의 몰락을 목도하게 합니다.
올바른 종교생활을 통해서 필멸의 삶에 희망을 주는 선한 삶을 가꾸어가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종교가 영혼을 채워야 하는 것이지, 오히려 영혼을 피폐하게 하여 절망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면
이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길을 잃게 됩니다.
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길 <한 줌도 안 되는 현실에만 집착하는 길>
현 생애 욕망과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될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욕망으로 가득한 삶에 집착하는 겁니다. 또한 이기적인 것으로 가득하여 필멸의 생애 끝에 후회할 -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일쑤입니다. 심지어 자식들에게도 대못을 박고 욕심으로 가득한 삶을 이기적으로 살고 있다가 황혼에 후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크루지 영감이 깨닫게 되어 선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정말로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타인에게 나누고 베푸는 것에 인색하고 이기적인 삶을 채워가는 사람들은 결국 불행하고 외로운 황혼을 맞게 됩니다.
셋, 인문학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길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의 이런 질문들에 답을 구하는 구도적인 삶입니다. 다행히도 오늘날 우리 인류는 그러한 구도적인 삶을 이끌어주었던 인문학적이 스승들이 많습니다. 유한한 삶이기에 소중한 시간들을 아끼면서 배우고 익히며 베푸는 삶을 가르쳐 주는, 인문학의 위대한 질문들과 답변들이 제시한 위인들을 닮고 싶습니다.
인문학의 스승들은 우리보다 먼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질문하고 탐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책들을 남겼고, 그 책들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현대와 후대의 인류에게 인류의 스승들이 전해준 유산, 고전들을 통해서 우리는 시한부 인생의 참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인문학의 고전들은 한 가지로 답을 하지 않습니다. 동양의 경전들, 노장자, 유가의 고전들, 불교의 경전들뿐만 아니라, 구약 신약 성경들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헬레니즘의 철학과 사상들까지 고전의 이야기들은 관점과 탐구의 영역들이 달랐습니다.
서양 철학의 역사가 위대한 것은 2000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근대, 현대의 사상을 꽃피운 겁니다. 또한 르네상스-고전-계몽-낭만-시민혁명-인상주의-표현주의-상징주의- 현대에 이르는 과감하고 혁신적인 문화 사조를 다양하게 발전시킨 겁니다. 단테 - 세르반테스 - 셰익스피어 - 괴테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 톨스토이, 20세기의 헤르만 헤세 -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코엘류까지 수많은 문학가들이 인문학의 길을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동양 철학과 불교 철학이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서양의 사상가들, 예술가들은 동양의 철학과 불교 철학에 빠져들었고, 기원전 축의 시대는 다시 20세기의 영혼들을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그 다양성이 인류에게 선택의 폭을 넓게 해주었고, 우리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동서양의 고전들을 마음껏 치우침 없이 탐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이는 종교적 광신, 사상적 맹신이 아닌 인문학의 시공간을 넘어서는 객관성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더불어 인류에게는 과학의 시발점도 인문학이었습니다. 깨달음, 영감의 방편으로 문학, 예술 등으로 인류의 정신문명을 고양高揚시켜 왔습니다. 인류는 시한부 인생이라는 종착점이 아닌, 인류의 후예들을 위한 건강한 문화와 문명의 힘을 인문학을 통해 전달하였습니다.
인문학 공부에서 우리가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지혜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 공부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좋은 마음공부를 할 수 있고, 동기부여 충전되어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는 인생 성공학의 모든 것이 인문학의 고전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인류는 더 이상 시한부 인생이 아니고 인류의 정신적 DNA가 후대에 올바르게 전달되는 선순환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왜 인문학을 공부하여야 하는지 자명한 이유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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