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애제자 알키비아데스의 비극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저자, 투키디데스(기원전 431년)는 역사를 서술하는데 객관적으로 접근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이전 역사가들이 소설처럼 집필하던 역사, 신화를 벗어나서 실제적인 역사의 이야기를 서사한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역사가의 의견을 쏟아내었다.
친구를 찾고 싶어 하지 않는 곳에서 친구를 찾고, 오래된 인연마저도 도움의
필요성에 굴복하게 했습니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그의 시대,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는 아테네가 멸망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사례들의 이야기들이다. 아테네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알키비아데스는 한때 가장 찬사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 또한 아테네인들에게 버려졌다. 그는 끝까지 감동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아테네를 배신하면서도 그의 재능을 펼치려고 하였던 점이다.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알키비아데스의 아버지는 그가 3살 때 전쟁에서 죽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페리클레스가 알키비아데스의 외삼촌이었고 그의 슬하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알키비아데스는 당대 최고의 미남으로 인기 있었고 최고의 권력 가문의 혈통이었다. 고대 올림픽의 전차 경기에서 우승하였고, 사교성과 말솜씨도 일품이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전투에서 승리를 이끄는데 공헌하였고 그의 앞날은 눈부실 것으로 예견되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 그는 젊은 시절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로 아테네인들 중에서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애제자였다. 소크라테스가 펠로페네소스의 전쟁터에서 알키비아데스를 구해낸 사실을 알키비아데스가 고백하는 내용이 플라톤의 <향연, 심포지엄>에 등장한다. 그만큼 소크라테스가 아꼈던 알키비아데스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테네의 희망이었다.
펠로페네소스 전쟁에서 지면서 무너져가는 아테네는 여러 가지 내부적, 외부적인 환경들이 악화되어 갔다. 내부적으로 아테네는 패배주의에 빠져들었다. 전쟁에서 연전 연패하게 되었고 이를 역전시키고 시민들을 통합하는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다. 외부적으로 델로스 동맹의 맹주에서 완전히 그 권위를 상실하였고, 무엇보다도 바다의 패권을 잃었다. 오히려 육상 국가였던 스파르타가 해상으로 진출하여 아테네 차지였던 해안 도시 국가들을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그곳이 밀레토스 학파의 탄생지였던 지역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아테네로부터 추방당한 알키비아데스가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페르시아와의 협상에서 오히려 구속당하는 신세가 된 그는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윽고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 함선 해군을 규합하고 키지코스 해전(기원전 410년)에서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무찌렀다. 그렇게 그가 아테네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그렇게 아테네의 영웅으로 다시 떠오른 알키비아데스는 쓰러져가는 아테네는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처럼 오만방자 하거나 스파르타 왕의 부인과 연애를 하여 도망치는 자충수를 두지도 않았다. 그도 세월의 슬기로움을 얻어서 중년의 철학을 가진 지혜로운 자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스파르타와의 마지막 일전에서 그의 부장이 그의 명령을 어기고 전투를 치른 원인으로 지게 된다. 기원전 406년 노티온 해전에서 패한 원인은 알키비아데스의 전략이 아니었지만 그의 정적들은 그를 두 번째로 추방하게 된다. 첫 번째는 사형 선도 직전 스파르타로 망명한 것이었고 복귀의 기회에 성공하였으나, 두 번째의 추방 선고는 치명적이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의 소유지에서 은둔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국에게 그의 지혜를 바치고자 하였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기원전 405년)에 아테네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는 스파르타와의 해전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은둔하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함대에게 그의 비책을 전달하였으나 그들은 그의 전략을 허풍으로 믿지 않았다. 그것이 스파르타의 함대에게 패전하는 마지막 아테네 해전이 되었다. 알키비아데스의 전략적 조언은 그의 조국 아테네의 승리를 위한 마지막 진심이었지만 물거품 되고 말았다.
그것을 끝으로 알키비아데스도 스파르타의 암살자들에게 마지막을 맞게 된다. 그가 절정의 지혜를 가지게 된 그 시절, 46세의 중년의 나이였다. 알키비아데스를 살려두면 스파르타에 큰 위협이 될 것을 확신하던 스파르타의 암살 청탁의 결과였다. 은둔하였던 그의 집을 불지르고 바깥으로 탈출하는 알키비아데스를 단검과 화살로 암살하였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 장군의 청탁으로 이루어진 암살이라고 하지만, 다른 설은 아테네인들의 사주를 받은 암살일 수도 있다고 한다.
아테네의 마지막 희망, 알키비아데스는 그렇게 굴곡진 삶을 살고 살해당했다. 조국 아테네의 영웅이었으나, 정적들을 만드는 정치력 부재와 오만방자함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스파르타에 망명하였으나 다시 스파르타를 배신하였다. 그가 조국 아테네를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조국 아테네에 귀환하기 위해서 수많은 망명생활을 견디고 기회를 만들었다. 페르시아를 끌어드려서 스파르타를 이기고자 한 것도 실패로 돌아갔지만 페르시아에게 스스로 지략으로 대승리도 하였다. 그런 영웅도 그 영웅시대를 오래 끌고 가지 못하였고 조국은 끝내 그를 버렸다. 비극적인 그의 운명만큼이나 아테네의 추락도 예견된 것이었다.
파란만장한 그의 짧은 생애는 오늘날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이 많다.
지도자는 자신을 믿어주는 지지자들에게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지가 아니라 추방과 같은 그 반대의 역공을 받아서는 지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반을 잃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지도자와 영웅은 시대가 만들어내기에 그 기회를 얻어야 한다. 그 기회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지지자들의 호응과 박수를 얻게 된다. 그의 충심이 아무리 진심이었더라도 시기를 놓치면 보여줄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된다.
알키비아데스의 운명은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젊디젊은 시절 죽음으로 단명하였을 것이다. 그가 그때부터 가볍게 언행하는 것을 멈추고 정적들을 만들지 않았다면, 제2의 패리클레스로 아테네를 부활시켰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역설이지만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망하고 멸망하게 된 것과 알키비아데스의 굴곡진 운명과 같은 궤적을 그린다. 영웅으로 태어날 수 있었으나 스스로 몰락의 씨앗을 뿌렸고, 그의 시대는 부활할 수 있었으나 그 시대는 이미 스스로 저물어버렸다.
절체절명의 전환의 시대, 세계는 어떠한 영웅적인 지도자를 기다리는가? 대한민국은 또 어떠한 시대를 맞이할 것인가! 멸망하였던 아테네 제국의 역사와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가 주는 시사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