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커크 <보수의 정신>진정한 보수 vs 역사의 진보

환단고기를 철저히 고증하고 태도 열린 역사관


프랑스 혁명이 끼친 역사적 흐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피를 불렀다. 이점도 기억해야 한다.


혁명 개혁당의 공포정치를 통해서 단두대에서 사망한 수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역사였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시민 혁명의 가치를 전 유럽에 뿌렸다. 그 시민들의 대표는 부르주아들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그 이후 부르주아들과 대치되는 비참한 노동자들의 다른 혁명을 부른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사상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후예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념은 결국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봉착하였다.




러시아 혁명은 공산주의의 망상이 얼마나 부질없고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전 세계를 휩쓸었던 20세기 우리는 그들과 싸워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었다.


세계는 소련(러시아), 중국의 공산주의, 전체주의에 맞서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내는 국가들과의 세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근대 역사는 진보주의자들이 이끌어왔다. 산업혁명은 진보의 물결을 세상 곳곳으로 확산하였다.


진보 없이는 인류가 이토록 급속도로 지난 200년간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진영 논리에 치우쳐서 기대려고 하지 않았다. 중도 중용을 언제나 우선 가치로 보고 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러셀 커트의 <보수의 정신>이라는 책을 만나고서 다시 한번 균형을 잡게 되었다.



결국 건전한 보수는 급진적 진보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용 정신을 가진 건전한 보수다. 건강하고 도덕적인 진보와 건전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를 생각하게 되는 좋은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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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공화주의에서 사회 진보의 더 높은 단계를 획득한


신생국 그리스나 남아메리카의 국가들을 좀 더 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번영과 희망의 보수 주의이고, 신사들이 이끄는 자유롭고


친절한 공화국이었다. 이는 단순한


온전 주의보다는


고매한 이상과 정의에 또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그의 권리를 확보해 주려는 끊임없는 의지"에


기반을 둔 생각이었다.


<'보수의 정신'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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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그의 권리를 확보해 주려는 끊임없는 의지가 보수주의라는 이 문장이 얼마나 큰 영감을 주는가! 나는 진보주의자들의 편협한 시선이 염려스럽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이 그 가치를 잃는 것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에머슨은 미국인들의 마음에 있던 평등이나 혁신을 추구하는


다양한 충동을 부채질했다. (중략)


성장과 변화와 생성을 극찬하고


문서나 타협으로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찬양할 때,


그는 몽환적인 초월주의자들에


국한되지 않은


대단히 광대한 청중에 도달한다.


에머슨은 권위에 맞서는 반란의 선지자다.


비록 그는 완고하게 개인주의적이지만,


때때로 재산의 "현 보유권"과 물질주의를 공격할 때는


사회주의를 슬쩍 내비친다.


이는 역설이 아니다.


진정한 보수주의, 벤담이나 스펜서의


관념에


감염되지 않는 보수주의는 개인주의의 대척점에 생겨난다.


개인주의는 사회적 원자론이다.


보수주의는 정신의 공동체를 강조한다.


<보수의 정신에서 인용>







이점은 분명히 '건전한 정신의 공동체를 사회로 보자'는 맥락이다. 분열된 사회가 아니고 공동체로 보는 사회에서 핵개인 시대 단절을 극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르크스는 심지어


"국가 전체에 더욱 평등하게 인구가


분산돼


마을과 국가의 구별조차 단계적으로


철폐"될 정도로


궁극적으로는 모든 요소가 무정형의


특징 없는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간다고 예언했다.



영원한 혁명은 영원한 불안과 영원한 불의다.


마르크스의 무자비한 꿈은 "국가의 소멸"이라는


그의 말은 부분적으로 용어의 속임수며


부분적으로는 자기 기만이다.


<보수의 정신 인용>







혁명은 지친다. 특히 영원한 혁명보다 안정을 원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상주의자였고, 그의 이상은 급진적인 혁명을 끊임없이 희생시킨다. 실패한 공산주의를 거부한다. 절대 이 땅에 공산주의의 악덕 폐단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 장 폴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한 대표적인 철학가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레닌과 스탈린 정권의 무자비한 학살의 역사를 보면서 공산주의 망상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고백하였다.








뿌리 없는 군중을 먹이로 번성했기


때문에


전체주의 국가는 과거의 지식을


더욱 혐오하고


적출해내려고 한다.


"과거라는 감각은 미래를 향한 희망보다


자유의 유지에 더 기본적이다.."


따라서 전체주의 정부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기억을 파괴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회적 의무를 철폐하려는


교묘한 방법이


동원된다. 사회적 의무 안에서


개인의 기억은


힘과 저항의 능력을 주기 때문이다.


<보수의 정신 인용>







개인들의 기억, 과거의 전통과 유산을 파괴하려는 전체주의는 개인들이 모두 희생양이 된다.


공산주의, 전체주의의 망상에서 우리의 기억을 파괴당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소중한 추억들을 잘 간직하면서 미래를 열어가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는 진정한 개별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중략)


일원론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동체 문제에 시민들이 순수하게 참여한다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물론 19세기의 독선적인 자유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중략)


진정한 개별성,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정신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국가라는 괴물에


맞서 싸워왔는가?


<보수 정신에서 인용>







일원론적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 사회 한 국가는 다원론적 민주주의여야 한다. 그 수많은 의견들이 어떻게 모아지는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힘이 발휘되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이 당면한 난제는


외로운 군중에게 열렬한 신앙을


되살리고


삶에는 목적이 있다고 환기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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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전통과 유산을 믿고 삶의 목적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외로운 군중의 열렬한 신앙'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삶의 꿈과 목적을 갖도록 메신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보수의 10대 원칙 : 커크 러셀 재단 저작권 소유>



하나, 보수주의자는 불변의 도덕적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질서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인간은 그 질서에 따라 만들어졌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상수다. 그리고 도덕적 진실은 영원하다.



둘, 보수주의자는 관습, 널리 오랫동안 합의된 지혜(Converntion), 계속성을 중시한다.


셋, 보수주의자는 소위 규범이라는 원칙을 믿는다.


넷, 보수주의자는 신중함이란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다섯, 보수주의자는 다양성의 원칙을 중시한다.


여섯,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원칙에 따라 보수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억제한다.


일곱,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와 재산권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확신한다.


여덟, 보수주의자는 자발적인 공동체를 지지하고 강제적인 집산주의에는 반대한다.


아홉,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격정과 권력을 신중하게 자제해야 할 필요를 인지한다.


열, 사려 깊은 보수주의자는 활력이 넘치는 사회라면 영속성과 변화를 반드시 인정하고 조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진보를 선호한다.


<'보수의 정신' 인용>







<세태에 대한 추가 글>


요즘 <환단고기>로 보수 진보 등 진영 논리가 되어 격론을 벌이는 정치권 분위기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다. 우리 고대 역사마저 여야, 보수니 진보니 하는 대립을 야기시키는 것이 이해 불가다.



보수의 균형감과 품격으로, 진보의 열린 역사관을 가지고 넓은 마음으로 우리나라의 고대사의 가능성을 보았으면 좋겠다. 흥산 문명(요하문명)의 시원 문명이 있지 않은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역사관을 존경한다.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진영논리에 편협한 시각으로 한반도 안으로 좁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환빠니 식빠니 하는 단어들의 극한 대립이 안타깝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식민사관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존엄이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균형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반도의 힘을 이야기하신 이어령 선생님의 사상이 필요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고대 한국사가 반도에 갇히는 사고는 배격한다. 우리 후대를 위해서도 전혀 유리할 것이 없다. 미래의 대한민국은 결국 대륙으로 다시 뻗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역사는 바로 서야 한다. 극단의 맹종이 아니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철저하게 연구하고 밝혀내야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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