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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산 Jul 19. 2018

허벅지가 말벅지

학교에서 자전거 전국일주를 떠난다기에 못 갈 거라 생각했다.

불과 몇 달 전 2박 3일짜리 설악산 행 자전거 하이킹에 동행 했다가 중간에서 발목을 다쳐 호송차에 실려 가 한 달 넘게 깁스를 했던 터라 지레 겁을 먹고 당연히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윤이는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벅찬 그 여행길에 동참하기로 하고 선생님, 친구들과 더불어 워밍업 하이킹을 시작하고 있었다.

가족보다 더 좋다는 사춘기 또래 친구들, 친절하고 믿음직한 선생님들과 함께 가는 신나는 여행길에 혼자만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려움이고 뭐고 들뜬 마음이 먼저 앞서는, 집 떠나 경험하게 될 젊음과 낭만의 꿈 같은 기회였는지 모른다.    

20일 여 자전거를 타고 도는 전국 일주코스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짐작이라도 했다면 떠나기 전 보약이라도 챙겨 먹였을 텐데 윤이의 호된 사춘기를 함께 치러내느라 반쯤 혼이 나가있어 그러질 못했다. 

게다가 그 지긋지긋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은 윤이와 잠시라도 떨어져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히 문제 해결의 가닥을 잡는 일이어서 떠날 날을 내가 더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내게는 핑계와 변명거리가 차고 넘친다.

마음만 있으면 하지 못할 일이 얼마나 될까.

사춘기 어린 딸의 치기어린 일탈조차 너그럽게 받아내지 못한 채 늪에서 허우적 대느라 먼 길 떠나는 딸 아이를 살뜰히 챙겨줄 마음이 없었나 보다.

무식이 용감이라고 보약은 커녕 옷과 장비도 충분히 챙겨주지 않고 몸이 불편한 딸 아이를 일행에 끼워 보냈으니 이런 내가 엄마의 자격이 있기나 한 것일까.    


걱정 반 설렘 반 20여일의 자전거 전국일주를 학교와 선생님들께 모두 맡기고

엄마들과 일행을 환송하고 나서야 윤이와 함께 보낸 사춘기의 쓰나미를 하나 둘씩 정리할 수 있었다.

윤이의 빈자리는 허전했지만 잠시의 이별은 홀가분했고 출산 후 처음 맛보는 그 낯선 가벼움에 살짝 흥분 되었다.

장애 가족이 없는 보통의 가정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맛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삶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건 마치 지고 있던 배낭의 무게를 불평할 틈도 없이 구슬땀을 흘리며 험한 산을 오르다가 바람이 시원한 중턱에 짐을 벗고 앉아 한숨 돌리면서 내 앞에 놓인 배낭의 무게와 크기를 비로소 깨닫게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배낭을 작은 걸로 바꿔 달라거나 꽉 들어찬 짐을 얼마간 빼달라거나 내 짐을 대신 지어달라고 하소연 할 수도 또 부탁 할 대상도 없었다.

무거워도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짐과 넘어야 할 산이 있으니 이 꿀맛 같은 휴식을 감사로 즐기고 누리면서 심기일전하여 다시 내 짐을 지고 길을 떠나야 할 것이었다.  


이 삼일에 한 번씩 씩씩한 목소리로 전해주는 윤이와 일행의 안부로 편안해진 마음은 시간이 더 지나자 원래 내 생활이 그런 것처럼 고행길의 딸아이를 깜빡 잊어버릴 정도였다.

23일째, 내일이면 학교에 도착한다는 윤이의 목소리에는 성취의 흥분 그리고 집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묻어있어 “힘들지 않았냐”, “많이 보고 싶다”정도의 말로도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날 밤 선생님, 친구들과 그간의 어렵고 험난했던 자전거 전국일주의 대장정을 함께 돌아보는 마지막 시간에 윤이는 감정에 복받쳐 말 대신 눈물만 펑펑 쏟았다고 하였다.    

정상인도 하기 힘든 자전거 전국일주를 해 냈다는 게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는지는 윤이가 그 여행을 마친 한 달 후 자전거로 지나온 길 어디쯤에서 사이클 대표 선수 몇명이 트럭에 치여 사망사고를 당했다는 기사를 접하고서야 실감이 났다. 그 위험하고 힘든 길을 아픈 몸으로 끝까지 무사히 마쳤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면서 자기의 실수와 행동으로 힘들어하던 엄마생각이 많이 났었고

자기도 다른 친구들처럼 할 수 있다는 걸로 미안함을 대신하고 싶어, 주저앉고 포기하고픈 마음을 꾹 참으며 이를 악물고 완주 했노라고 털어놓을 땐 가슴이 미어져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야했다.

   

그 때  재윤이를 꽉 껴안고 고맙다고, 애썼다고, 네 성취가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공감하고 표현하지 못 했던 것이 이렇게 오래도록 후회로 남을 줄은 몰랐다.

너무 감정적이지 않게 적당한 거리에서 이성과 논리로 차분히 대해줘야 감성 덩어리 눈물 많은 윤이가 그나마 중간을 유지하며 의젓한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손과 발에 장애를 가지고 새처럼 조그맣게 태어난 윤이와 가족 모두를 위해서 절대 일희일비 하면 안 된다고 처음부터 나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터라 불쑥불쑥 감성이 일렁이는 마음자리에 철옹성을 둘러왔는지 모른다.

마음과 가슴이 아닌 이성과 논리로 하는 자식사랑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이후 자기 허벅지가 말벅지라고 뻐기듯 자랑하면서 걷고 있어도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 같다 하던 웃음 띤 목소리가 어제인 듯 생생한데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 같은 그때를 추억하는 지금의 내가 어색할 따름이다.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  해 줄 게 아무것도 없게 된 이제는, 절제된 사랑으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던 그때의 ‘나’와 엄마의 가슴과 온기를 그토록 갈망했던 윤이의 모습이 겹쳐져 문득 문득 후회와 상념에 잠기곤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생의 마지막 열정을 모두 쏟아낸 ‘전국 일주 자전거 하이킹’의 부산물 ‘말벅지’는 병상에서 잠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훈장처럼 간직했던 값진 추억의 한 조각으로 재윤이의 영혼에 흔적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 ‘말벅지’가 내게는 못 다 준 사랑의 이야기로 오래오래 기억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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