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한 불합격 통보
최근 한 출판사에 3차례에 걸쳐 테스트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에서야 나왔다.
어떤 곳을 지원했는데, 탈락한 것은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꽤 그 시간들이 아쉽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내가 어느 위치에 올랐을 때 평가의 위치에 있을 때 잘 알지 못하는 타인들에게 꼭 이렇게 정중하고 섬세한 답장을 주고 싶다.
불합격 통보가 이렇게 아름답고 고맙게 느껴질 수가 있는지. 더 도전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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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단순한 몇 가지 문항의 답변에 대한 평가이지, 귀하께서 이제까지 쌓아 오신 과목에 대한 안목과 실력, 수많은 잠재력에 대한 평가가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최적의 인원을 뽑기 위해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여 지원자분들의 다각적인 개성과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게 이상적이나, 시간적인 여유와 능력 부족으로 효율적이지만 다소 기계적인 평가를 통할 수밖에 없는 저희의 형편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평가에서는 귀하와 인연이 되지 못하여 저희가 어쩌면 훌륭한 인재를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번 결과에 대해 너무 기분 상하시지 않기를 다시금 부탁드리며, 쉽지 않은 테스트에 성심성의껏 참여해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귀하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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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고작 이 이메일을 통해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알 것만 같다.
이 사람은 오늘도 본인의 자리에서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해내고, 퇴근길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오늘 자신이 보낸 이메일에 관해, 자신과 인연이 되지 못했던 어떤 이들을 아주 잠깐 떠올렸을 것이다.
조금 웃기지만 나는 인연을 믿으려 한다.
더 성실하고 더 공부하고 더 악착같이 사는 것보다 더 로맨스를 믿고,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을 생각해보려 한다.
언젠간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지구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와도 나는 나이고, 우리가 진짜 인연이라면, 우리가 보이지 않는 빨간 줄을 손가락에 매고 있다면 말이다.
퇴사 후 내가 한 일은 적당히 컴활 공부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자전거를 자주 타고, 섹스 앤 더 시티를 보고, 가끔 면접을 보러 다닌 일이다.
오늘은 아주 오래간만에 내방 책상이 아닌 광화문 스타벅스에 와서 노트북을 켜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지하철에서는 그냥 동네에나 있을 걸 후회막심했으나 아니 전혀, 이곳에 나온 일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오늘 광화문역에서 퇴근하는 인파를 뚫고 그들과 반대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 반대의 길을 가야만 하는 사람. 그렇게 태어난 사람. 그 이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 볼 수가 없는 사람
내가 이제까지 읽어왔던 책들, 들어왔던 노랫말, 내 남자친구가 매일 내게 하는 응원의 말들, 내 친구 j가 꿈꾸는 미래들을 기억해본다. 그것들을 계속해서 듣고 살고 싶다. 그것들이 계속 유지하려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지난 몇 주가 내가 누구인지 잃으려고 애쓴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로맨스를 믿고, 남자친구의 말을 믿고, 우리 엄마 나이 든 손을 믿고, j를 믿고, 너를 믿고 나를 믿고, 뉴욕의 가식 속에서 친구와의 우정과 사랑을 믿고. 다시 해보자. 그렇게 해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