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2020년 늦여름에 있었던 일

by 호피

사직서를 냈다.

내가 사직서에 근무부서와 내 이름 석 자, 날짜를 채워 넣는 동안

지난 한 달하고 17일간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글자를 채워놓는 동안 내 앞에 하얀색 마스크를 쓴 인사팀 대리가 나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2주 전 재계약서를 쓸 때 너무 평가가 좋으세요 알바로 들어오셨더라도 직원까지 하셨으면 좋겠다고 함박웃음을 짓던 그 대리가 맞았다.

나는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남겨보고 싶어졌다.

내가 아무리 조각조각 기억의 파편들을 타인에게 말해보아도 답답하긴 매한가지니깐

하나의 글로 정리하면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싶었다.

면접 보는 날 양쪽 눈의 크기가 너무 확연하게 다른 여자가 들어왔다.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 눈이 부으면 저렇게까지 차이가 크게 날 수도 있구나...

첫 만남인데 저 사람도 살짝 신경 쓰일 수도 있겠네'

나를 설명할 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이력서도 없이 나는 나를 소개하고 그 사람은 내 이야기를 공책에 받아 적었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나는 작가라고 대답했다. 졸업해서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자 맞은편 그녀가 딱히 계획은 없어 보이네요 여기는 학원이 아니에요 본인이 근무시간 외에 스스로 공부하셔야 돼요라고 답했다.

나는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내가 언론사 사무직으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다려도 연락이 온 곳은 이곳뿐이었다.

면접 본지 이틀째 되는 날 전화를 받았다. 면접전형을 통과하셔서 출근하시면 되세요. 아주 대충인 목소리였다. 심드렁함 그 자체.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다시 물었다. 전화기 속 한심한 목소리의 여자는 짜증을 내듯 면접 담당자에게 전화를 넘겼다.

눈 크기가 다른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온라인 학생관리라고 그녀가 말해주었다. 나는 다음 주는 당장 어렵다고 2주 뒤에 출근하겠다고 대답했다. 아쉬울 것이 없었다.

여자는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이곳에서 강렬하게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첫날과 마지막 날뿐이었다.

나를 채용한 사람은 구 부장으로 불리는 사람이었고, 2주 뒤에 다시 만난 사람의 눈은 2주 전과 마찬가지로 짝짝이였다. 아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상한 건 이상한 채로 바뀌지 않는다는걸.

이곳에서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다 사람은 그렇게 되는 걸까?

어쩌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말을 내뱉게 된 걸까?

어쩌다 이곳에 이런 사람들이 모이게 된 걸까?


그곳에서 유일하게 관심 가는 것은 이곳에 모인 50명 남짓한 사람들이었다.


근무 첫날

대표로 보이는 거대한 몸집의 여자에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했다. 나를 그냥 지나쳤다.

서글서글해 보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대리가 나에게 부서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시켰다.

대표방에 들어가서 다시 거대한 인간에게 인사를 한다. 얼굴 같아 보이는 구멍에서 '아까 봤어'라는 말이 나왔다.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금방 해맑은 채로 유지해야 했다.

그럼 너도 인사를 해...

사수라는 생각이 되는 여자가 채팅창에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여자:대표님이 잘 웃지 않으시죠, 그래도 집에 가실 때 꼭 인사하고 가세요

나: 아 그런가요? 웃는 게 좋은데...

여자: 순진하시군요 원래 회사에는 웃음이 없어요

자신의 동료들에게 웃음이 헤픈 여자였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꽤 친절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탕비실에서 사탕을 잔뜩 가져와 내 책상에 올려둔 사람이었다.

집에 와서 그 여자 얼굴을 떠올려보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대체 하루 종일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채팅을 했던 걸까?

나는 그 이후로 한 달하고 일주일간 매일매일 그 여자에게 뭔가를 배우고 적고 이해했다고 말했다.

그 여자와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손을 볼 때마다 사무실에서 오래 일한 사람의 손이라고 느꼈다.

노동과 가사로 늙은 우리 엄마의 손과 다른 손의 느낌. 그녀가 마우스를 손에 쥘 때, 자판기를 칠 때마다

개구리 손가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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